2013 동아시안컵 여자부에 출전한 대한민국 일본 북한 중국 등 4팀 중에서 객관적인 전력이 가장 떨어지는 팀은 한국이다. FIFA 랭킹 3위인 일본은 월드컵까지 제패한 레벨이고, 9위의 북한 역시 여자 축구계의 강호다. 비록 한국(16위)보다 한 단계 아래인 17위에 그치고 있으나 중국은 왕년에 세계를 호령했던 전통의 팀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모여 펼치는 작은 규모의 대회지만 참가팀 면면의 수준은 세계에 근접했다. 이런 팀들과의 대결을 앞두고 윤덕여 한국 여자대표팀 감독은 “목표는 우승”이라고 천명했다. 사실 안방에서 열리는 대회를 앞두고 외치는 형식적 다짐 정도로 해석됐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강호 북한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태극낭자들의 투혼은 아름다웠다. 정신력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경기를 펼치고 있기에, 지금의 현실이 더 안타깝다. 사진= 김재현 기자 |
효과도 있었다. 전반 26분 선제골을 뽑아냈다. 전가을이 오른쪽에서 개인기로 상대수비들을 따돌리고 중앙으로 쇄도한 뒤 지소연에게 공을 연결했고, 지소연은 집중력을 잃지 않은 채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을 버텼다. 이때 흐른 공을 김수연이 왼발 슈팅으로 연결해 북한의 골망을 흔들었다.
아마도 이 분위기를 오래도록 유지했다면 보다 좋은 경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때문에 어설픈 장면에서 허용한 어설픈 동점골이 너무 아쉽다. 전반 36분, 상대의 크로스가 한국 문전에 투입됐을 때 한국과 북한 선수를 합쳐 8~9명이 엉켰다. 혼전 중 제대로 걷어내지 못하면서 결국 허은별에게 동점골을 내줬다. 막을 수 있었다는 미련이 컸던 한국 선수들의 상실감은, 불과 2분 뒤 역전골로 이어졌다.
전반 38분, 북한의 2번째 골은 북한 여자축구의 수준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프라인에서 공이 길게 오른쪽으로 연결되면서 우측면이 완벽하게 뚫렸고 이후 김수경의 날카로운 크로스와 허은별의 정확하고 강한 헤딩슈팅으로 연결되면서 한국은 역전을 당했다. 남자들의 공격 전개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깔끔했던 장면이었다. 이쯤이면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태극낭자들의 투혼은 객관적인 전력 차를 상쇄시켰다.
팀으로서의 전술적 완성도나 부분전술 그리고 개개인의 체력적인 면에서 모두 북한은 한국보다 앞섰다. 태극낭자들이 비등하게 견줄 수 있었던 것은 정신력이었다.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뛰려는 의지가 눈에 보였다. 덥고 습한 날씨가 한국 선수들만 비껴갈리 만무하다. 힘든 것은 매한가지란 뜻이다. 그러나 이겨냈다. 체력적 소모가 큰 축구에서 끝까지 이 악문 힘으로 버티긴 힘드나, 놀랍게도 버텨냈다.
많이 뛰는 것으로는 추종을 불허한다는 북한 여자대표팀도 지쳐갔는데 외려 태극낭자들은 ‘에너자이저’였다. 그 작은 체구에서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윤덕여 감독이 “후반에 승부를 걸고자 했다”고 밝힌 것처럼 계획대로 후반에는 공격 빈도도, 결정적 찬스도 한국이 더 많았다. 열매가 없었다는 것이 아쉬우나 충분히 잘 싸웠다.
잘 싸웠으나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해야할 봐야하는 이유를 증명한 북한전이다. 잘 싸웠기 때문에 한국 여자축구의 발전을 위한 생산적인 고민이 필요함을 느낀 경기다. 언제까지 선수들의 ‘정신력’과 ‘투혼’에 박수만 보내야하는지, 안쓰러운 지경이다.
언제까지 소를 얻거나 소를 잃어야 외양간을 바라보는 행동을 반복할 것인지 안타깝다. 부실한 외양간에서 답답해하고 있는 재능들이 많다. 사진= 김재현 기자 |
정신력만으로도 이토록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고 있는데 보다 현실적인 지원이 있다면 충분히 더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한국의 여자축구다. 북한의 김광민 감독은 “한국의 여자축구가 생각보다 빨리 발전하고 있다”는 칭찬을 전했다. 이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는 “더 발전하기 위한 방법은 스스로 잘 알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밖에서 조언할 개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옳은 충고다. 때문에, 맞물린 윤덕여 대표팀 감독의 호소를 귀담을 필요가 있다.
윤 감독은 경기 후 “우리는 궁극적으로 2015년 캐나다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대회의 경험은 선수들에게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라면서 “개인적인 소망을 말한다면, 이런 대회가 아니더라도 A매치가 더 마련됐으면 한다. 여자축구가 활성화 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한다”는 진심어린 당부를 전했다. 한국 여자축구가 최소한 지금보다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마도 이번 동아시안컵이 끝나면 열악한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반성의 목소리가 나올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지금껏 때마다 그랬던 것을 아는 까닭이다. 국제대회의 호성적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소를 얻거나, 국제대회에서의 부진으로 소를 잃어버려야 한국 여자축구라는 외양간이 부실하다는 것을 느껴왔다. 이런 반복으로는 궁극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북한전에서 보여준 태극낭자들의 투혼은, 우리들도 좀 주목해달라고 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경기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을 비롯해 고위 관계자들이 다수 참석했다. 지소연의 개인기, 전가을의 드리블, 심서연의 경기조율 능력을 보았을 것이다. 90분 동안 지치지 않는 체력을 보았을 것이다. 재능이 많은 선수들이 적잖다. 부실한 외양간에서 답답해하고 있는 재능들이 많다.
[MK스포츠 축구팀장 lastuncle@mae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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