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협력관계이며, 세계에서 유례 없는 특수한 관계다”(김영삼 전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YS)과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영원한 라이벌’이자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다. 두 사람의 인생은 곧 한국 현대 정치사 그 자체로 불린다. 6년 전 서거한 DJ의 뒤를 이어 YS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국 정치를 이끌었던 ‘양김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두 사람은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어깨를 나란히하며 싸웠고, 때로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YS와 DJ는 ‘물과 기름’ 같다는 이희호 여사의 회고가 가장 정확한 묘사일 것이다.
YS와 DJ는 둘 다 섬 출신(거제도·하의도)이지만 배경은 매우 달랐다. YS는 지역 유지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랐다. 이후 26세 나이에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을 세우는 등 ‘탄탄대로’ 정치인생을 시작했다. 반면 DJ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6세에 사업에 성공한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DJ는 4번의 도전 후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됐다.
성격도 판이했다. YS는 ‘감의 정치’를 중시했지만, DJ는 철두철미한 논리를 강조했다. 1980년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할 당시 두 사람은 직선제개헌 서명운동 목표를 넣고 논쟁을 벌였는데, 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YS가 “천만인 서명운동을 하자” 하니 DJ는 현실성을 감안해 “100만으로 하자”고 했지만, YS는 역으로 “그걸 누가 다 세어보겠냐”며 1000만 서명을 밀어붙였다.
두 사람의 첫 대결은 68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이었다. 당시 유진오 총재가 DJ를 지명했지만, YS의 반대로 인준에 실패해 DJ는 고배를 마셨다. 평생 이어졌던 두 사람 사이 불신이 이 사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두 번째는 40대(YS·DJ·이철승)만이 대선 후보에 도전한 사상초유의 사건,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이었다. ‘40대 기수론’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는 DJ가 승리했다. YS는 후보 수락 연설문까지 작성해 놓았을 정도로 압승을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YS는 경선 이후 “김대중 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다. 김대중 씨의 승리를 위해 전국 어디든지 누빌 것을 약속한다”고 했고,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
이후 두 사람은 군부 정권 독재에 맞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며 민주화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YS는 곧바로 DJ의 정치활동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DJ 또한 가택연금 중에도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신민당 총재 선거에서 YS를 지지하라고 당부했다.
‘경쟁’에서 ‘협력’의 기류로 돌아선 YS와 DJ의 최고의 합작품은 1979년 신민당 전당대회다. 당시 DJ는 “유신을 끝내기 위해 싸우는 데는 김영삼 씨가 제일 낫다”며 ‘호랑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주변 만류에도 YS를 지지했다고 한다. 탄력을 받은 YS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투쟁 수위를 한층 더 끌어올리며 강경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또 1984년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출범시킨 민주화추진협의회를 통해 YS와 DJ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고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꺼져갔던 민주화의 불씨를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87년 대선 당시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등을 돌리고 만다.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YS(득표율 28%)와 DJ(27%)는 노태우(36.7%)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양김의 분열’은 군부 연장이라는 결과를 초래했고, 정권교체를 갈망했던 국민과 야권 진영에 실망을 안겼다. DJ는 자서전에서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고 했다.
이후 YS는 ‘3당 합당’을 통해 1992년 대선 때 DJ와 마지막 숙명의 대결을 펼치고 먼저 대권을 거머쥔다. YS와 DJ가 모두 대통령직을 마친 이후에도 두 사람 간 불편한 관계는 이어진다. 서로를 ‘배신자’로 부르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YS는 퇴임 후 DJ의 노벨상 수상까지 평가절하하며 DJ를 비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무려 22년이 지난 2009년 극적인 화해의 길을 걸었다. YS는 2009년 8월, 투병 중인 DJ를 찾은 후 “이제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며 동반자이자 라이벌인 DJ를 떠나보냈고 22일 자신도 눈을 감았다.
[김강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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