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과 가톨릭이 만난 지 230년이 되는 해이다. 길다면 긴 이 시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시복식이 두 차례 거행됐다. 첫 시복식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79위), 두 번째 시복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에(24위)으로 두 번 모두 로마에서 열렸다. 두 번에 걸쳐 복자품에 오른 103위 순교자들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오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릴 124위 순교자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 시복식이다. 103위 순교 성인의 선조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이었던 124위 순교자 시복은 특히 로마가 아닌 서울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도움을 받아 이 세 번의 시복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개념도 생소한 ‘순교자 표창식’, 로마 가는 길만 3개월
한국인 대표는 신부 1명, 유학생 2명뿐
◆ 1925년 79위 시복식 = 1925년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식이 로마에서 열렸다. 이때 미국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장면(장익 주교의 아버지), 장발 형제가 시복식에 친인척은 아니지만 친인척 자격으로 참가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시복식이 대략 6월에 있을 것이라 예측하고, 시복식이 열리는 로마가 너무 멀기 때문에 미리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다. 70세를 넘긴 서울교구 뮈텔 주교와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 두 분이 대표가 돼 3월 17일 수행원도 없이 출발했다. 두 사람은 여객선을 타고 부산을 출발해 일본 고베, 중국 상해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 사이공, 이집트 수에즈 운하 등을 경유해 프랑스 마르세유를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을 떠났다. 이들은 3개월의 긴 여정 끝에 6월 17일 로마에 도착했다.
79위의 시복식이 7월 5일에 열린다는 것도 5월초에야 알게 됐다. 시복이라는 용어도 없던 터라 당시 신문은 ‘순교자 표창식’(동아일보 1925년 3월 19일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로마까지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가난한 신자들은 안타까움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경향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가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해서 5월 11일 로마를 향해 떠났다. 또한 7월 1일에 장면, 장발 형제가 로마에 도착했다.
한 신부는 시복식 풍경을 경향잡지에 ‘로마여행일기’로 연재해 소개했다. 시복식은 일반인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한국 순례단 136명 전세기 타고 참석...파독 간호사도 동참
아리랑 부르며 교황께 감사 인사..1984년 성인품에 등극
◆ 1968년 24위 시복식 =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이 시복식에는 한국에서 전세기로 도착한 순례단 136명이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밖에도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 65명과 유럽에 유학 온 천주교 신자 등도 함께 있었다. 시복될 남종삼의 후손 7명도 함께 했다.
미사 주례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1969년 추기경에 서임)가 교황을 대리해서 맡았다. 그 역시 할아버지 김보현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의 후손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 칙서’ 낭독에 이어 김 대주교의 선창으로 ‘떼 데움(Te Deum, 사은 찬미가)’이 시작되고, 성당 전면에 걸려 있는 복자들의 초상화를 가린 막이 걷혔다. 미사의 여러 부분에 한국어가 사용됐으며, 시복식과 교황 바오로 6세의 특별 연설은 5개 국어로 중계됐다. 미사 마지막에 교황청 합창대가 ‘복자찬가’를 부르자 한국인 참가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강론에서 24위의 한국 순교자들을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앙의 귀감’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했다. 24위 복자가 로마에서 시복될 때 한강변 새남터순교성지와 양화진 복자기념 성당에서도 미사가 거행됐다. 다음 날 한국 신자들은 김수환, 노기남, 장병화 주교를 모시고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교황은 거듭 한국 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했고, 1시간 20분이나 걸린 알현은 아리랑을 부르며 마무리됐다.
1925년 첫 시복식에는 한국인이 단 3명 참여했지만, 1968년 시복식에는 전세기로 참여할 정도로 많은 신자가 참석했다. 두 번에 걸쳐 복자가 된 이들은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순교 현장 바라보며 교황이 시복 미사 주례
대리자 아닌 교황이 직접 집전하는 것 이례적
◆ 2014년 124위 시복식 =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 미사를 주례한다.
고작 3명의 한국인만이 참석하고 나머지는 마음으로만 함께해야 했던 1925년 시복식, 전세기를 타고 참여한 두 번째 시복식을 거쳐 신자 20만 명이 넘게 참여하는 세 번째 시복식이 치러지는 것. 로마가 아닌 한국의 중심 서울 광화문 앞에서 윤지충 바오로, 강완숙 골룸바,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이성례 마리아 등 영광스런 순교자들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 한국 천주교회는 이미 감동의 물결이다.
한국 천주교회 측은 “대한민국은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한 교회로, 극심한 박해를 이겨내고 지금의 복음화를 이뤄냈다”며 “시복은 교황의 대리자가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땅에서 직접 시복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고 영광스런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아울러 “서울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포도청‧서소문 형장 등 한국의 제1세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기도 해 뜻깊다”고 덧붙였다.
[매경닷컴 장주영 기자 semiangel@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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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릴 124위 순교자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 시복식이다. 103위 순교 성인의 선조이자 한국 천주교회의 주춧돌이었던 124위 순교자 시복은 특히 로마가 아닌 서울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의 도움을 받아 이 세 번의 시복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개념도 생소한 ‘순교자 표창식’, 로마 가는 길만 3개월
한국인 대표는 신부 1명, 유학생 2명뿐
◆ 1925년 79위 시복식 = 1925년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복식이 로마에서 열렸다. 이때 미국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장면(장익 주교의 아버지), 장발 형제가 시복식에 친인척은 아니지만 친인척 자격으로 참가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시복식이 대략 6월에 있을 것이라 예측하고, 시복식이 열리는 로마가 너무 멀기 때문에 미리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다. 70세를 넘긴 서울교구 뮈텔 주교와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 두 분이 대표가 돼 3월 17일 수행원도 없이 출발했다. 두 사람은 여객선을 타고 부산을 출발해 일본 고베, 중국 상해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 사이공, 이집트 수에즈 운하 등을 경유해 프랑스 마르세유를 거쳐 로마로 가는 길을 떠났다. 이들은 3개월의 긴 여정 끝에 6월 17일 로마에 도착했다.
79위의 시복식이 7월 5일에 열린다는 것도 5월초에야 알게 됐다. 시복이라는 용어도 없던 터라 당시 신문은 ‘순교자 표창식’(동아일보 1925년 3월 19일자)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로마까지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가난한 신자들은 안타까움이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경향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가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어렵사리 여비를 마련해서 5월 11일 로마를 향해 떠났다. 또한 7월 1일에 장면, 장발 형제가 로마에 도착했다.
한 신부는 시복식 풍경을 경향잡지에 ‘로마여행일기’로 연재해 소개했다. 시복식은 일반인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한국 순례단 136명 전세기 타고 참석...파독 간호사도 동참
아리랑 부르며 교황께 감사 인사..1984년 성인품에 등극
◆ 1968년 24위 시복식 =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이 시복식에는 한국에서 전세기로 도착한 순례단 136명이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밖에도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 65명과 유럽에 유학 온 천주교 신자 등도 함께 있었다. 시복될 남종삼의 후손 7명도 함께 했다.
미사 주례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1969년 추기경에 서임)가 교황을 대리해서 맡았다. 그 역시 할아버지 김보현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의 후손이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시복 칙서’ 낭독에 이어 김 대주교의 선창으로 ‘떼 데움(Te Deum, 사은 찬미가)’이 시작되고, 성당 전면에 걸려 있는 복자들의 초상화를 가린 막이 걷혔다. 미사의 여러 부분에 한국어가 사용됐으며, 시복식과 교황 바오로 6세의 특별 연설은 5개 국어로 중계됐다. 미사 마지막에 교황청 합창대가 ‘복자찬가’를 부르자 한국인 참가자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강론에서 24위의 한국 순교자들을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앙의 귀감’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했다. 24위 복자가 로마에서 시복될 때 한강변 새남터순교성지와 양화진 복자기념 성당에서도 미사가 거행됐다. 다음 날 한국 신자들은 김수환, 노기남, 장병화 주교를 모시고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교황은 거듭 한국 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표했고, 1시간 20분이나 걸린 알현은 아리랑을 부르며 마무리됐다.
1925년 첫 시복식에는 한국인이 단 3명 참여했지만, 1968년 시복식에는 전세기로 참여할 정도로 많은 신자가 참석했다. 두 번에 걸쳐 복자가 된 이들은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순교 현장 바라보며 교황이 시복 미사 주례
대리자 아닌 교황이 직접 집전하는 것 이례적
◆ 2014년 124위 시복식 =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 미사를 주례한다.
고작 3명의 한국인만이 참석하고 나머지는 마음으로만 함께해야 했던 1925년 시복식, 전세기를 타고 참여한 두 번째 시복식을 거쳐 신자 20만 명이 넘게 참여하는 세 번째 시복식이 치러지는 것. 로마가 아닌 한국의 중심 서울 광화문 앞에서 윤지충 바오로, 강완숙 골룸바, 유중철 요한, 이순이 루갈다, 이성례 마리아 등 영광스런 순교자들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 한국 천주교회는 이미 감동의 물결이다.
한국 천주교회 측은 “대한민국은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한 교회로, 극심한 박해를 이겨내고 지금의 복음화를 이뤄냈다”며 “시복은 교황의 대리자가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땅에서 직접 시복 미사를 거행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이고 영광스런 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아울러 “서울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포도청‧서소문 형장 등 한국의 제1세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기도 해 뜻깊다”고 덧붙였다.
[매경닷컴 장주영 기자 semiangel@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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