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주말 오후 슬슬 발길을 옮겨본다. 경칩(驚蟄)이 지났는데 아직 한낮에도 쌀쌀한 바람이 분다. 베이징 서쪽에 백운관(白雲觀)이라는 도교 사원이 있다. 오늘의 목적지는 그곳이다.
입구에 다다랐더니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다. 가만히 보니 입구의 돌 조각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운관에 있는 세 마리 돌 원숭이를 만지면 병을 치료하고 악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저렇게 사람들이 원숭이 조각을 쓰다듬는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 기자가 백운관에 온 목적은 돌 원숭이를 만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관우(關羽)상을 직접 보기 위해서이다. 관우가 누구인가? 동양 최고의 고전(古典) 삼국지(三國志)에서도 최고의 명장이자 슈퍼스타 아닌가. 하지만, 이곳 백운관에서 만큼은 관우는 명장이 아니다. 이곳에서 관우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가져다주는 재물의 신(財神)이기 때문이다.
사원 안을 천천히 거닐다 재신전(財神殿) 앞에 다다르니 자욱한 연기에 눈코가 매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끊임없이 향불을 피워서 사당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행운과 복을 비는 사람들 때문에 재신전 근처는 늘 이렇게 연기가 자욱하다고 한다. 재신전 앞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 “올해 재물 운이 크게 와서 꼭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주말 늦은 오후라 그나마 사람들이 덜 붐비는 거라고 한다. 춘제(春節)처럼 의미 있는 날이면 재신전 밖으로 족히 수백 명은 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실제로 바깥에선 사람이 없어 보였지만, 재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북새통이다. 저마다 향초와 손수 가지고 온 음식들을 들고선 자신의 재물 운을 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군신(軍神) 관우가 재물의 신으로 모셔진 까닭에 대해서는 중국인들도 정확히 잘 모른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워낙 많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인터넷 검색엔진인 바이두(白度)에 올라 있는 몇 가지 가설을 나열해본다. 가장 공감되는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먼저 관우의 고향인 하동(河東) 해량(解良), 지금의 산시(山西)성 윈청(運城) 지역 사람들은 상나라, 진나라 등 고대 시대부터 소금을 팔아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 상인들이 천하를 떠돌며 장사를 하면서 동향 사람인 관우를 수호신으로 모신 게 유래가 됐다는 설이다.
둘째, 예부터 사업할 때 충(忠)과 의(義)는 최고 덕목인데, ‘충의’ 하면 떠오르는 게 관우여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관우를 모시면서부터 재물의 신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우가 보기와는 달리 계산에 능해서 실제로 유비와 함께했던 초창기에는 참모의 역할을 능숙하게 해냈으므로 사후 재물신으로 모셔졌다는 설도 있고, 삼국지에서 관우가 금은보화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상인들이 관우를 존경하고 자신들을 수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쌓여 재물의 신이 됐다는 말도 있는 등 가설도 십수 가지이다.
어떤 이야기든지 결국 중국 사람들의 관우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관우를 부를 때 이름 그대로 부르지 않고 관성제군(關聖帝君)이나 이를 줄여서 관제, 아니면 관공(關公)이라고 높여 부르곤 한다. 기자가 백운관 재신전에 들어갔을 때 한 나이 든 중국인은 아예 관신(關神)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가 서울 한복판에도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동묘다. 정확한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인데, 이를 줄여서 동묘라고 부르고 있다.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지나는 ‘동묘앞역’의 그 동묘가 맞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정 온 명나라 장수들이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한 뒤에 조선 땅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고 한다. 이에 전쟁 후 명나라에서 조선에 정식으로 관왕묘를 지을 것을 요청했고, 1601년 동관왕묘가 완공됐다. 동관왕묘 이전에 남대문 바깥으로 남관왕묘도 있었고, 고종 때는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도 지었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동관왕묘 한 곳만 온전히 남아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불교계 일각에서는 관우를 호법신(護法神)으로 받들어 가람보살(伽藍菩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무슨 좋은 자리만 있으면 전부 관우를 갖다 맞추는 통에 중국에서 관우의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중국에서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있을까?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장 성공한 인간은 바로 관우일세“
윤석정 베이징 특파원
입구에 다다랐더니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다. 가만히 보니 입구의 돌 조각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백운관에 있는 세 마리 돌 원숭이를 만지면 병을 치료하고 악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저렇게 사람들이 원숭이 조각을 쓰다듬는다고 한다.
백운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재물의 신 관우
하지만, 오늘 기자가 백운관에 온 목적은 돌 원숭이를 만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관우(關羽)상을 직접 보기 위해서이다. 관우가 누구인가? 동양 최고의 고전(古典) 삼국지(三國志)에서도 최고의 명장이자 슈퍼스타 아닌가. 하지만, 이곳 백운관에서 만큼은 관우는 명장이 아니다. 이곳에서 관우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가져다주는 재물의 신(財神)이기 때문이다.
사원 안을 천천히 거닐다 재신전(財神殿) 앞에 다다르니 자욱한 연기에 눈코가 매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끊임없이 향불을 피워서 사당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행운과 복을 비는 사람들 때문에 재신전 근처는 늘 이렇게 연기가 자욱하다고 한다. 재신전 앞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 “올해 재물 운이 크게 와서 꼭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재신전은 향을 피워 소원을 비는 사람들로 붐벼 늘 연기가 자욱하다. / 사진 = MBN 촬영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주말 늦은 오후라 그나마 사람들이 덜 붐비는 거라고 한다. 춘제(春節)처럼 의미 있는 날이면 재신전 밖으로 족히 수백 명은 되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고 한다. 실제로 바깥에선 사람이 없어 보였지만, 재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북새통이다. 저마다 향초와 손수 가지고 온 음식들을 들고선 자신의 재물 운을 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천하의 명장 관우는 어찌하여 재물의 신이 됐을까?
군신(軍神) 관우가 재물의 신으로 모셔진 까닭에 대해서는 중국인들도 정확히 잘 모른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워낙 많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 인터넷 검색엔진인 바이두(白度)에 올라 있는 몇 가지 가설을 나열해본다. 가장 공감되는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먼저 관우의 고향인 하동(河東) 해량(解良), 지금의 산시(山西)성 윈청(運城) 지역 사람들은 상나라, 진나라 등 고대 시대부터 소금을 팔아 돈을 벌었다고 한다. 이 상인들이 천하를 떠돌며 장사를 하면서 동향 사람인 관우를 수호신으로 모신 게 유래가 됐다는 설이다.
재신전 안에 모셔져 있는 관우. 재물 운을 빌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 사진 = MBN 촬영
둘째, 예부터 사업할 때 충(忠)과 의(義)는 최고 덕목인데, ‘충의’ 하면 떠오르는 게 관우여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관우를 모시면서부터 재물의 신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관우가 보기와는 달리 계산에 능해서 실제로 유비와 함께했던 초창기에는 참모의 역할을 능숙하게 해냈으므로 사후 재물신으로 모셔졌다는 설도 있고, 삼국지에서 관우가 금은보화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상인들이 관우를 존경하고 자신들을 수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쌓여 재물의 신이 됐다는 말도 있는 등 가설도 십수 가지이다.
베이징의 한 식당 입구에 놓인 관우. 식당 매니저는 “중국에선 관우를 모셔놓아야 장사가 잘된다는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 / 사진 = MBN 촬영
어떤 이야기든지 결국 중국 사람들의 관우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관우를 부를 때 이름 그대로 부르지 않고 관성제군(關聖帝君)이나 이를 줄여서 관제, 아니면 관공(關公)이라고 높여 부르곤 한다. 기자가 백운관 재신전에 들어갔을 때 한 나이 든 중국인은 아예 관신(關神)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울 한복판의 관우묘…동묘는 동관왕묘를 줄인 말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이야기가 서울 한복판에도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동묘다. 정확한 명칭은 동관왕묘(東關王廟)인데, 이를 줄여서 동묘라고 부르고 있다. 지하철 1호선과 6호선이 지나는 ‘동묘앞역’의 그 동묘가 맞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정 온 명나라 장수들이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한 뒤에 조선 땅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고 한다. 이에 전쟁 후 명나라에서 조선에 정식으로 관왕묘를 지을 것을 요청했고, 1601년 동관왕묘가 완공됐다. 동관왕묘 이전에 남대문 바깥으로 남관왕묘도 있었고, 고종 때는 북관왕묘와 서관왕묘도 지었지만, 지금은 다 사라지고 동관왕묘 한 곳만 온전히 남아있다.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손에 쥐고 늠름하게 서 있는 관우. 중국 사찰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사진 = MBN 촬영
그런가 하면 중국 불교계 일각에서는 관우를 호법신(護法神)으로 받들어 가람보살(伽藍菩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듯 무슨 좋은 자리만 있으면 전부 관우를 갖다 맞추는 통에 중국에서 관우의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중국에서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있을까?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장 성공한 인간은 바로 관우일세“
윤석정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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