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안준철 기자] 1987년은 모두 치열했던 한 해였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경찰이 쏜 최루탄에 숨진 이한열 열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의 개봉으로 1987년의 뜨거웠던 민주화 열기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이제 개봉한 지 열흘 남짓 지났지만 민주화를 향한 시민과 학생들의 뜨거운 가슴을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7년의 프로야구도 치열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지 6시즌에 해당하는 해였다. 프로야구 출범당시 6개구단 체제였던 프로야구는 1986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의 창단으로 7개 구단 체제를 열었다. 1987년은 7개 구단 체제의 두 번째 시즌이었다. 1987시즌은 팀당 108경기, 총 378경기를 치렀다.
1987년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두각을 나타냈다.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승4패로 패퇴했던 삼성은 타격코치 박영길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고, 프로야구 최초의 팀타율 3할을 기록했다. 김성래, 장효조, 이만수, 허규옥, 류중일 등 5명이나 세 자리 수 안타를 때려냈고 장효조가 타격(타율 0.387)과 출루(0.461), 이만수가 타점(76점)과 장타율(0.579), 김성래 가 홈런(22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장효조는 이해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인왕은 빙그레 이정훈이 차지했다. 124개의 안타로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한 이정훈은 타율 0.335 4홈런 20도루 30타점을 기록했다.
삼성은 막강한 타선과 23승6패를 기록한 에이스 김시진을 앞세워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삼성은 불과 2년 전인 1985년에도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1위를 기록,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1987년은 달랐다. 1985년 삼성이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는 제도적 맹점을 시정하기 위해 1986년부터 포스트시즌 제도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크게는 전기 1, 2위와 후기 1, 2위 팀에게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부여하는 것인데, ▲ 한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한국시리즈 직행 ▲ 한 팀이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안에 들면 플레이오프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팀이 4팀이면 전기 1위와 후기 2위, 전기 2위와 후기 1위 간의 5전 3선승 플레이오프 후 한국시리즈 실시가 큰 골자였다.
삼성은 한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한다는 규정에 따라 한국시리즈 직행해서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오는 팀을 기다리게 됐다. 우승 가능성이 높았던 한 해. 하지만 1987년은 해태의 전성기가 막 시작된 해로 프로야구 역사에 남게 됐다.
◆ 해태 왕조의 서막을 알린 1987년
해태는 1986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1986년에는 해태가 전·후기 모두 2위를 차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1986년 전기 1위 삼성과 후기 1위 OB베어스의 5전 3선승제 플레이오프를 거쳐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올라왔고, 4승1패로 해태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광주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삼성 투수 진동한이 관중석에서 날아온 소주병에 맞는 일이, 대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해태 버스가 삼성팬들에 의해 전소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해태는 전기 2위 OB와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플레이오프는 5차전까지 가는 혈투였고, 해태가3승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막강 타선을 자랑하는 삼성은 해태에 설욕을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리즈는 4승 무패로 해태의 손쉬운 우승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첫 한국시리즈 4연승 우승이자, 2연패 팀의 탄생이었다. 이후 해태는 1989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해태 왕조를 구축했다. 1987년 한국시리즈 MVP는 시리즈 내내 불방망이를 앞세웠던 김준환이었다.
1987년 프로야구를 수놓은 대표적 명승부가 바로 선동열(해태)과 최동원(롯데)의 끝장 승부다.
1987년 5월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해태-롯데전이었다. 5시간 가까이 이어진 15회 연장 승부에서 선발로 등판한 최동원과 선동열은 끝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결과는 2-2 무승부. 선동열은 232개, 최동원은 209개의 공을 던졌다. 투수진을 선발-불펜-마무리로 운영하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투구수였다. 선동열의 232개는 아직도 한 경기 최다 투구수로 남아 있다.
네 살 터울이지만, 최동원과 선동열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이자, 라이벌로 꼽힌다. 또 영남-연세대(최동원), 호남-고려대(선동열)로 지역과 학교도 라이벌 구도를 만드는데 한 몫했다. 둘의 맞대결은 모두 3차례 있었다. 1987년 15회 연장 혈투는 마지막 3번째 맞대결이었다. 첫 맞대결은 1986년 4월 선동열의 프로 첫 완봉승이었다. 물론 최동원도 못 던진 게 아니었다. 해태의 1-0 승리였고, 최동원은 3회 송일섭에게 솔로 홈런을 맞고, 아쉽게 완투패를 당했다. 최동원이 1985년부터 이어온 12연승을 멈추게 하는 경기였다. 두 번째는 최동원의 설욕전이었다. 4개월 뒤인 같은해 9월 최동원은 2-0 완봉승을 챙겼다. 이번엔 선동열의 완투패였는데, 수비 실책으로 내준 2점(비자책) 때문에 패전투수가 됐다. 3차례 맞대결에서 1승1무1패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1987년 선동열은 평균자책점 0.89로 타이틀홀더(당시는 방어율왕)가 됐다. 최동원은 탈삼진(163개) 타이틀을 가져갔다. 둘의 맞대결은 2011년 영화 ‘퍼펙트게임’으로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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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프로야구도 치열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지 6시즌에 해당하는 해였다. 프로야구 출범당시 6개구단 체제였던 프로야구는 1986년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의 창단으로 7개 구단 체제를 열었다. 1987년은 7개 구단 체제의 두 번째 시즌이었다. 1987시즌은 팀당 108경기, 총 378경기를 치렀다.
1987년에는 삼성 라이온즈가 두각을 나타냈다. 1986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승4패로 패퇴했던 삼성은 타격코치 박영길을 새 감독으로 선임했고, 프로야구 최초의 팀타율 3할을 기록했다. 김성래, 장효조, 이만수, 허규옥, 류중일 등 5명이나 세 자리 수 안타를 때려냈고 장효조가 타격(타율 0.387)과 출루(0.461), 이만수가 타점(76점)과 장타율(0.579), 김성래 가 홈런(22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장효조는 이해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인왕은 빙그레 이정훈이 차지했다. 124개의 안타로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한 이정훈은 타율 0.335 4홈런 20도루 30타점을 기록했다.
삼성은 막강한 타선과 23승6패를 기록한 에이스 김시진을 앞세워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삼성은 불과 2년 전인 1985년에도 전·후기리그에서 모두 1위를 기록,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1987년은 달랐다. 1985년 삼성이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는 제도적 맹점을 시정하기 위해 1986년부터 포스트시즌 제도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크게는 전기 1, 2위와 후기 1, 2위 팀에게 포스트시즌 진출권을 부여하는 것인데, ▲ 한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한국시리즈 직행 ▲ 한 팀이 전·후기 중 한 번만 2위 안에 들면 플레이오프 진출 ▲ 포스트시즌 진출 팀이 4팀이면 전기 1위와 후기 2위, 전기 2위와 후기 1위 간의 5전 3선승 플레이오프 후 한국시리즈 실시가 큰 골자였다.
삼성은 한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한다는 규정에 따라 한국시리즈 직행해서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오는 팀을 기다리게 됐다. 우승 가능성이 높았던 한 해. 하지만 1987년은 해태의 전성기가 막 시작된 해로 프로야구 역사에 남게 됐다.
◆ 해태 왕조의 서막을 알린 1987년
해태는 1986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1986년에는 해태가 전·후기 모두 2위를 차지,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1986년 전기 1위 삼성과 후기 1위 OB베어스의 5전 3선승제 플레이오프를 거쳐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올라왔고, 4승1패로 해태가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광주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삼성 투수 진동한이 관중석에서 날아온 소주병에 맞는 일이, 대구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해태 버스가 삼성팬들에 의해 전소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7년 프로야구 정규시즌 MVP는 장효조였다. 삼성은 그해 장효조를 중심으로 프로야구 최초 팀타율 3할을 기록했다. 삼성 2군 감독을 지낸 장효조는 지난 2011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1987년도 해태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리턴매치였다. 해태는 우승트로피를 방어하는 역할이었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다. 1987년 전기리그는 롯데와 공동 3위, 후기는 2위였다. 해태는 롯데, MBC와 함께 후기리그 막판까지 치열한 2위 경쟁을 펼쳐 왔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 해태가 롯데를 1경기차로 간신히 따돌리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해태는 전기 2위 OB와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플레이오프는 5차전까지 가는 혈투였고, 해태가3승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막강 타선을 자랑하는 삼성은 해태에 설욕을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시리즈는 4승 무패로 해태의 손쉬운 우승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이후 첫 한국시리즈 4연승 우승이자, 2연패 팀의 탄생이었다. 이후 해태는 1989년까지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해태 왕조를 구축했다. 1987년 한국시리즈 MVP는 시리즈 내내 불방망이를 앞세웠던 김준환이었다.
1987년 롯데 최동원은 해태 선동열과 연장 15회까지 맞대결을 이어가는 명승부를 연출했다. 당시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최동원은 2011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후 롯데는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하고 사직구장 앞에 동상을 세웠다. 사진=MK스포츠 DB
◆ 선동열과 최동원의 연장 15회 명승부1987년 프로야구를 수놓은 대표적 명승부가 바로 선동열(해태)과 최동원(롯데)의 끝장 승부다.
1987년 5월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해태-롯데전이었다. 5시간 가까이 이어진 15회 연장 승부에서 선발로 등판한 최동원과 선동열은 끝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결과는 2-2 무승부. 선동열은 232개, 최동원은 209개의 공을 던졌다. 투수진을 선발-불펜-마무리로 운영하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투구수였다. 선동열의 232개는 아직도 한 경기 최다 투구수로 남아 있다.
네 살 터울이지만, 최동원과 선동열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이자, 라이벌로 꼽힌다. 또 영남-연세대(최동원), 호남-고려대(선동열)로 지역과 학교도 라이벌 구도를 만드는데 한 몫했다. 둘의 맞대결은 모두 3차례 있었다. 1987년 15회 연장 혈투는 마지막 3번째 맞대결이었다. 첫 맞대결은 1986년 4월 선동열의 프로 첫 완봉승이었다. 물론 최동원도 못 던진 게 아니었다. 해태의 1-0 승리였고, 최동원은 3회 송일섭에게 솔로 홈런을 맞고, 아쉽게 완투패를 당했다. 최동원이 1985년부터 이어온 12연승을 멈추게 하는 경기였다. 두 번째는 최동원의 설욕전이었다. 4개월 뒤인 같은해 9월 최동원은 2-0 완봉승을 챙겼다. 이번엔 선동열의 완투패였는데, 수비 실책으로 내준 2점(비자책) 때문에 패전투수가 됐다. 3차례 맞대결에서 1승1무1패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1987년 선동열은 평균자책점 0.89로 타이틀홀더(당시는 방어율왕)가 됐다. 최동원은 탈삼진(163개) 타이틀을 가져갔다. 둘의 맞대결은 2011년 영화 ‘퍼펙트게임’으로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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