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당신의 선택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크리스마스. 거리에 흐르는 성탄절 노래는 두 손 꼭 잡은 커플들을 축복한다. 외롭지 않을 거라 마음을 단단히 잡아맸던 솔로들에게 위기의 날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탄생일’이라고, ‘연인은 없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친구가 있다’고···외로움의 생채기를 핥지만, 그 상처는 쓰라릴 뿐이다.
자, 솔로들의 선택은 무엇인가. 용감하게 거리로 나가 타인의 행복과 나의 초라함을 비교할 것인가. 아니면 잠시 눈 감은 채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격언을 따라 집 안에 있을 것인가. 현실을 부정하며 집에 있다한들 TV에 나오는 연말 특선 영화는 올 한해도 이렇게 지나간다는 걸 잔인하게 알려줄 뿐이다. ‘넌 혼자’라는 팩트가 지친 나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가 직접 해봤다. TV 시청자가 아닌 주인공이 돼보자. 최첨단 1인 방송 시대를 살아가는 솔로들을 대표해 BJ( Broadcasting Jockey)에 도전했다.
1인 방송을 하기로 결심했으나 머리와 행동은 쉽게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불특정 다수에게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게임 방송을 해볼까. 1인 방송 콘텐츠 가운데 70% 정도가 게임 방송이라고 한다. 인기 게임을 앞세워 방송할 꼼수도 고민해봤다. 그러나 PC방에서 친구들에게 비난받던 게임 실력이 떠올라 조건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송하기 전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계속됐다. 결국 ‘얼굴은 까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얼굴만 공개할 수 없었다. 1인 ‘방송’이기에 콘텐츠가 필요했다. BJ와 시청자 사이의 적절한 공통분모를 찾아야 했다. 방송 플랫폼 사이트에 접속해 ‘방송 테마’를 훑어봤다. ‘토크·캠방’ ‘먹방(먹는 방송)’ ‘뷰티·패션’ ‘게임’ ‘생활정보’···
캠방(캠코더 방송)을 하자니 시청자의 끝없는 외모 지적이 있을 것 같았고, 먹방을 하자니 음식을 맛있게 먹을 재주가 없었다. 10년 넘게 동네미용실을 이용하는 나에게 뷰티·패션 분야도 무리였다. 하위 테마까지 셀 수 없는 주제들이 존재감을 뿜어댔지만 끌리는 것은 선뜻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박근혜 대통령 변호인단이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답변서 내용이었다. 그래, 소통이다. 나라님이 못한 소통 내가 해주리라. 인터넷 방송의 장점은 그것 아니겠는가. 나에게는 감춰진 7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고, 인터넷 방송이 대국민담화가 아닐뿐더러 질문을 받고 홀연히 뒤로 사라질 곳도 없었다. 내 이야기를 하되 정적이 흐르는 시간에 음악을 틀자. 소통왕이 되자는 사명감으로 방송 콘텐츠는 ‘대화하는 음악 방송’으로 결정했다.
◆ BJ 이름은 ‘남자하아나’로
시청자들에게 방송 첫인상이 되는 건 내 얼굴이었다. ‘방송쯤이야 별거 아니다’는 주문을 외웠지만 이미 손은 샤워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이것이 인지부조화란 말인가. 시련을 이겨내고 말끔한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리라. 출근 준비를 하는 경건한 자세로 씻으면서 방송 데뷔의 불안도 털어냈다.
‘방송시작’만 누르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도 BJ가 되는 시대다. 그러나 음악 방송을 위해 노트북으로 방송하기로 했다. 시청자가 원하는 음악을 음원 프로그램으로 재생하기 위해서였다. 노트북에 달린 카메라 화질도 썩 나쁘지 않았다.
BJ 이름은 ‘남자하아나’로 지었다. 남자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은 본능 탓이었을까. ‘하나’가 아닌 ‘하아나’를 ‘남자’ 뒤에 붙인 것도 같은 맥락이었을까. ‘남자하나’가 아닌 ‘남자하아나’가 담고 있는 고독을 여성 시청자들이 느껴주길 원해서였을까. 수많은 성찰을 하면서 방 제목은 ‘안녕’으로 했다. ‘당신이 오든 말든 나는 상관없다’라는 차가운 도시의 남자처럼····
방송을 켜고 방송 화면에 담긴 내 모습을 보니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시작이구나. 모르고 있던 사이에 방송 화면 속에 나는 어색하다 못해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청자의 말에 귀 기울이리라. 1시간 전 초심을 다시 일깨우면서 채팅방에 시청자가 채워지길 기다렸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멀뚱히 화면만 바라본 지 30여분이 지났다. ‘안녕’ 방은 세상 어느 곳보다 고요하고 적막했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함’이라는 뜻인 안녕처럼 내 방은 편안했으나 쓸쓸했다. ‘네가 신경 쓰는 만큼 세상은 너에게 관심이 없어.’ 아차 싶었다. BJ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어그로(관심 끌기)에 소홀했던 것이다.
일단 칙칙해 보이는 방송 화면에 손을 대야 했다. 시야에 탁상용 스탠드가 들어왔다. 그렇다. ‘조명빨’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달리 생기없어 보이던 화면 속 얼굴에 핑계거리가 생긴 셈이자 시청자를 불러모을 수 있는 도구의 발견이었다. 스탠드 조명을 얼굴 쪽으로 했다. 적절한 얼굴의 왜곡과 캠빨. BJ로서 한 단계 도약한 것이다. 방 제목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다시 지었다. 이 역시 소통왕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이었다.
◆ 피죤과 전역…인터넷 방송에서 만난 남자들
잔잔했던 채팅방에 물결이 일었다. ‘피죤’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시청자가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카메라와 마이크가 작동 중이었으나 무의식은 자판을 때리며 인사를 건넸다. 마치 놓치면 안 되는 사냥감을 발견한 듯 말이다. “안녕하세요. 헬요일 잘 보내셨나요?” 월요일을 헬요일이라고 표현하는 센스까지. 역시 내 첫 시청자다웠다.
누군가 침묵은 금이라 했건만, 인터넷 방송에서 침묵은 곧 시청자의 이탈이다. 입을 떼야 했다. 하지만 오랜 침묵으로 입은 잘 움직이지 않았고, 처음 건넨 말은 “방송 잘 들리세요?”였다. 구원요청이자 애원의 한마디였다. 시청자는 “네 잘 들려요”라고 친절하게 답해줬다.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청자는 대학교 졸업을 앞둔 경남 진해에 사는 청년이었다. 학업을 마치면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유럽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외국어 공부에 관심이 많았다. 몇 마디 오가자 시청자는 “말씀 편하게 하세요ㅎ”라고 했으나 나는 “아이고, 아닙니다”고 말했다. ‘아이고’에 담긴 감정은 ‘제발’과 같았다. ‘제발 나가지 말아주세요’라는 보이지 않는 외침이었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관심사는 영화 얘기로 흘러갔고, 시청자는 영화 ‘라라랜드’를 추천했다. 내친김에 함께 OST를 들었다. ‘City Of Stars’를 들으면서 대화는 무르익어갔다. 주연 배우인 라이언 고슬링이 직접 피아노 연주를 했다는 시청자의 해설도 곁들여졌다. 영화 덕분이지 지루할 틈 없었다.
두 남자는 인터넷 방송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남자하아나’는 여자를 만나는 차가운 도시의 남자가 아닌 외로운 솔로 남자 2명의 신세를 예고했던 것일까. 크리스마스를 앞둔 평일 밤에 두 남자는 로맨스 영화 ‘라라랜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뜻밖의 감성적인 밤을 만들어준 남성 시청자는 방을 떠나기 전 “즐겨찾기 해뒀으니 쉬실 때 방송하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시청자일 때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즐겨찾기’가 BJ에게는 굉장한 칭찬이자 보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서울 올라올 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시청자의 고백 아닌 고백에 잠시 당황했으나 외로운 밤을 함께 지샌 찬사 쯤으로 여겼다.
첫 시청자와 만난 후 자신감은 넘쳤다. 유명 BJ가 된 기분이랄까. 인터넷 방송계의 스포트라이트가 내게 쏟아지는 듯했다. 입도 풀렸겠다,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라디오 DJ 못지않은 공감 능력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빼앗을 준비는 끝났다.
기대도 잠시, 다시 적막과 마주했다. 몇몇 시청자가 발을 들여놓긴 했지만 금세 빠져나갔다. 가득 부풀었던 자신감도 김빠진 콜라처럼 밍밍해졌다. 방송 오류가 난 것은 아닐까. 휴대전화로 방에 접속해 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시청자 몇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BJ들이 한없이 대단해 보였다. 신입 BJ들에게 그들은 전지현이자 공유였다. 기획 능력은 나영석 PD 뺨치는 것이었다.
졸음이 차츰 몰려오던 때 채팅방이 다시 요동쳤다. 이번에는 여성 시청자일까. 그렇지 않았다. 남자 캐릭터 아이콘이 대화창에 떴다. 사용자 이름에 ‘전역’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조심스럽게 직업을 물었다. “군인이에요ㅋㅋㅋㅋ. 말년휴가 나왔어요.” 말년휴가, 군생활에서 가장 좋을 때다. 키읔이 연달아 붙는 웃음이다. 세상에서 가장 홀가분한 키읔일테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곳은 솔로 남자를 위한 공간이자 ‘우정의 무대’이니라. 우리 함께 외로움의 역사를 만들어보자. 온 우주의 기운이 모이는 듯했다. 올해도 솔로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라는 계시라고 믿기로 했다.
“직업은 어떻게 되세요? 걸그룹 많이 보셨어요? 누구누구 보셨어요? 걸그룹 없었으면 군 생활 못 버텼어요.” 기승전걸그룹. 시청자는 군인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꽤 오랜만에 군 복무 시절 연병장과 생활관이 떠올랐다. 유격 훈련 때 맡았던 매캐한 화생방 가스도 콧구멍을 스쳐지나갔다. 이 사람은 솔로부대 전우다. 그렇게 전역을 며칠 앞둔 군인과 인터넷 방송에서 만났다.
걸그룹에 이은 시청자의 질문이 쏟아졌다. “꿈이 기자였어요. 기자 어떻게 하면 되는 건가요? 월급은 얼마나 되나요?” 질문에는 군인의 패기와 말년병장의 여유가 묻어났다. 취업을 앞둔 청년의 고민도 느껴졌다. “여자친구는 왜 없나요?” 인터넷 방송을 시작한 원초적인 질문을 받자 굳건했던 정신은 흔들렸다. “그러게요….”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어수룩한 미소뿐이었다.
질문을 정신없이 받아내니 밤은 더 깊어갔다. “나중에 또 올게요. 아직 궁금한 게 많아서…즐찾(즐겨찾기)해놨어요.” 작별인사를 하는 시청자에게 “몸 조심히 전역 잘해요”라고 선배 전역자로서 진심을 담아 그의 축복을 빌었다.
채팅을 보고 대화를 하면서 음악을 트는 것뿐이었으나 인터넷 방송은 녹록지 않았다. 4시간가량 방송을 한 뒤 마지막 시청자와 작별인사했다. 반바지에 웃옷만 차려입은 모습처럼 보여준 것보다 보여주지 않은 게 더 많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옷을 벗어 던지고 잠자리에 들었다. 인터넷 로맨스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진한 브로맨스를 원했던 건 더 더욱 아니었고. “즐찾했어요.” 그럼에도 누군가 나와 잠시 연결됐다는 감정들은 새로웠다. 그러나 눈에 흐르는 것은 땀인지, 눈물인지.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솔로일 것 같다는 건 익숙한 느낌이었다.
[디지털뉴스국 한인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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