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싹 사각사각…. 한 남성이 칼로 비누를 깎는다. 일정하게 움직이는 손이 리듬을 타는 듯한 영상은 45분 동안 이어진다. 출연자의 얼굴이 한 번이라도 나올 법하지만, 영상은 끝까지 비누를 깎는 모습과 소리에 집중한다.
비누 깎는 영상은 지난 9월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라온 뒤 397만명이 봤다. 한 누리꾼은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눈을 감고 들으면 평온해진다”고 댓글을 달았다. 다른 누리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비누 깎는 소리를 담은 ASMR 영상이다. ASMR은 자율감각 쾌락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의 약자로, 뇌를 자극해 심리적 안정을 유도하는 원리를 말한다. 생소한 개념 같지만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고 듣기 좋은 소리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고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백색소음의 한 종류다.
ASMR은 미국 대체의학 사이트를 중심으로 논의된 심리치료 효과를 현실에 적용한 사례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을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영국 스완지 대학 연구팀은 ASMR 이용자 500명을 조사해 “대다수 이용자는 휴식을 위해 ASMR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지난해부터 유튜브 등을 통해 전파된 ASMR은 최근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가수 전효성은 지난 5월 MBC ‘마이리틀텔레비전’에 출연해 ASMR을 소재로 개인방송을 했다. 성우 서유리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작은 소리로 동화를 읽어주는 ‘아주 사적인 동화’라는 인터넷 방송을 운영했다.
ASMR을 만드는 이들은 ‘아티스트’라고 불린다. 작은 소리를 그대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특정 상황을 연출해 시청자의 몰입도를 높인다. 비누를 깎는 영상은 전체를 검은 배경으로 하고 손과 비누에 초점을 맞췄다. 간단해 보이지만, 영상과 소리가 도드라질 수 있도록 연출한 것이다.
다나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ASMR 아티스트다. 그는 유튜브에 2013년 10월 첫 영상을 올린 뒤 수건 접는 소리, 젤리·초콜릿·껌 등을 입에 넣고 먹는 소리 등 150개 동영상을 올렸다.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32만 5000여 명이고, 전체 동영상 조회수는 5300만 건을 넘어섰다.
다나는 채널 소개 동영상에서 “내가 처음 느꼈던 ASMR 경험은 어렸을 때 엄마가 귀를 파주는 느낌, 친구가 머리를 만져주거나 따줬던 것들이었다. 머리 정수리부터 등을 타는 간지럽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느낌은 ‘팅클(tingle)’이라고 부른다. ASMR를 다루는 쪽에서는 각종 소리가 방아쇠 역할을 해 팅클 반응, 즉 기분 좋게 소름 돋는 느낌이 나온다고 보고 있다. 일상의 작은 소리가 반복되면 팅클을 느끼게 되고 이내 편안한 마음이 든다.
ASMR 동영상 제작자들은 의도하지 않은 소음이 담기는 것을 경계한다. 일상 소음을 주제로 한 영상이지만,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는 주변 소리는 평온함을 깨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어폰으로 모니터링하고 행동을 천천히 하면서 온전히 의도한 소음을 담는다.
인터넷 방송 BJ(Broadcasting Jockey)들도 최근 ASMR을 이용한 영상을 올리고 있다. 일부 제작들은 더 민감한 소리를 담기 위해 수백만원이 넘는 3D 녹음기로 방송을 녹음한다.
[디지털뉴스국 한인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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