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영화를 보면 통신병이 아군에게 좌표로 위치를 찍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편이 적의 공격을 받고 있다. 그 적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표를 찍어줄 테니까, 전투기나 대공 포화로 그곳을 공격해달라. 그래서 공격받는 아군을 구해달라"는 요청이다. 전쟁에서나 나올 법한 이 같은 '좌표 찍기'가 요즘 인터넷에서도 유행이다.
좌표 찍는 방법은 누군가의 실명이나 얼굴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이다. 그가 우리 편을 공격하고 있다는 내용도 당연히 함께 올린다. 물론 자기 편에게 그를 공격하라는 말은 직접 하지 않는다. 단지 그 적의 공격으로 우리 편의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음을 호소할 뿐이다.
지난 15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자칫 '좌표 찍기'로 해석될 수 있는 글과 사진을 게시했다. 추 장관은 한 통신사 기사가 카메라를 들고 자신의 아파트 현관 앞에 나타났다고 했다. 사생활 영역이니 촬영하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기자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물론 추 장관의 글에는 자기 편에게 그 기자를 공격해달라는 취지의 메시지는 한 줄도 없었다. 단지 언론사의 부당한 취재로 본인이 고통받고 있음을 호소한 거였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부족주의적 전통이 강한 곳. 우리 부족, 다시 말해 우리 편이 공격받고 있는데 가만히 있는 건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분기탱천한 마음이 든다. 결국 공격에 나서게 된다. 과거 '좌표 찍기'로 읽힌 여러 사례들이 이를 입증한다. 사람들은 자기 편을 공격한 상대 편의 SNS 계정과 이메일 주소를 찾아낸다. 그의 SNS 메시지로 공격을 퍼붓는다. 이메일로도 비난과 욕설의 글을 보낸다. 휴대폰 번호까지 파악해 문자 폭탄도 떨어뜨린다.
이날 추 장관 페이스북에는 그 기자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나는 그 기자에 대한 공격이 거기서 멈추기를 소망한다. 추 장관과 같은 편의 사람들이 그 기자의 개인 정보를 찾아내 비난과 욕설 폭탄을 퍼붓는다면, 추 장관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좌표 찍기'의 잘못을 저지르고 만 셈이 된다.
어떤 이들은 '좌표 찍기 공격'의 행태를 보이는 이들에게 후회와 자책을 기대하지만 대개 이는 착각이다. 사실은 그 반대다. 그들은 정신적 보상까지도 받는다. '할 일을 했다'고 느끼는 데에서 오는 쾌감이다. 적의 부당하고 부도덕한 공격 앞에서 우리 편을 지키는데 일조했다는 만족감이다. 상호 격려는 그 같은 쾌감을 키운다. 혹시 자신이 상대에게 부당한 고통을 안겨준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같은 편에게서 받는 격려는 '역시 내가 잘한 거야'라는 확신을 키운다.
게다가 그들은 어두운 욕망을 배설하는 쾌감까지도 느낀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폭력성이 내재돼 있는 법. 그 숨겨진 폭력성을 같은 편과 함께 폭발시키며 배설할 때는 그게 정당하다고 착각하는 게 매우 쉽다. '봐라. 나만 그런 게 아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의견이고, 같은 행동을 하잖아'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좌표 찍기는 부족주의적 후진적 행태다. 부족을 나눠 싸우던 야만적 습성을 닮았다. 우리 부족을 누군가가 공격하면 복수하던 선사시대의 행태를 그대로 닮은 것이다. 문명화된 현대 사회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잘못을 응징하지 않는다. 법과 절차에 따라 심판한다. 그러라고 정부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적을 심판하겠다는 건, 우리 사회의 시계를 수만 년 전 야만의 시대로 돌리는 행태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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