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 기흥IC를 막 지나치면 오른쪽으로 네모반듯한 8층 건물이 보인다. 특색없는 건물이지만 최근 1주일새 6조원이 넘는 규모의 기술수출 성과가 탄생한 곳이다. 한국 제약산업을 한단계 도약시킨 연구개발(R&D)의 심장인 한미약품 연구센터이다.
10일 오전 찾아간 연구센터는 고요했다. 6조원 메가딜 성공의 흥분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안내를 맡은 이회철 연구지원팀장은 “6조원이라는 돈이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는 데다 연구원들의 성향 자체가 조용하다”고 말했다.
8층의 연구센터 건물은 기능별로 잘 분화돼 있었다. 1층에는 연구소장실과 연구지원팀 정보관리팀 등 주로 지원부서가 자리잡고 있고 수면실도 따로 마련돼 있다. 이 팀장은 “업무 특성상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어 수면실을 1층에 배치했다”고 말했다. 연구센터 구석구석을 돌아보자 한미약품의 눈부신 성과의 비결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전임상 단계까지 원스톱으로…체계적인 연구시스템
2~8층까지가 연구시설로 150명의 연구원이 분야별로 과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3층과 4층은 각각 합성신약연구팀과 바이오신약팀의 연구시설이다. 실질적인 약품 연구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
랩스커버리지를 개발한 4층 바이오신약팀을 보면 연구실이 연구흐름에 따라 배치돼 있다. 4층 입구쪽 연구실에서는 바이오신약의 주성분인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 대장균을 배양하고 그 옆방에서는 여기서 단백질을 따로 추출한다. 그 옆 연구실에서는 추출한 단백질을 약물 전달 물질인 랩스 캐리어와 결합시킨다. 이런 과정을 거쳐 랩스커버리지와 신약물질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약품이 만들어지면 5층과 8층으로 옮겨져 동물실험과 약리 독성실험을 거친다.
연구센터측은 “이 건물 안에서 임상 전 단계까지 모든 연구 과정을 원스톱으로 끝낼 수 있다”며 “속도가 생명인 R&D에서 이것은 중요한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빠른 의사결정
권세창 연구소장은 매일 오전 7시 30분 회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하는 일이 컴퓨터를 켜고 각 연구의 진척도를 챙기는 것이다.
분야별 연구 진척도는 실시간으로 보고돼 연구팀과 연구소장, 사장, 회장이 모두 같은 내용을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정보는 모바일로도 공유된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보 공유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갖춰졌다.
더 중요한 것은 하드웨어보다 이를 운용하는 소프트웨어다. 한미약품 연구센터는 보고절차도 연구소장-사장-회장으로 단순화돼 있어 어느 회사 보다 의사결정이 빠르다. 임성기 회장과 이관순 사장, 권세창 연구소장이 20년 가까이 손발을 맞춰온 사이라는 점도 빠른 의사결정을 돕는다.
3개월에 한번씩 하는 연구결과 보고회도 빠른 의사결정을 돕기 위한 절차다. 이 보고회에는 임성기 회장이 직접 참여한다. 회사 관계자는 “연구를 계속할지, 방향을 바꿀지, 아니면 중간에 그만 둘지 등에 대해 결정을 정확하게 해줘야 한다”며 “모든 의사결정자들이 모여 3개월에 한번 이런 결정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에 대한 관용
한미약품은 2013년 C형간염 신약을 개발하고 중남미에서 임상2상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랩스-인터페론 알파’로 불리는 이 약은 하지만 임상2상 도중 갑자기 중단 결정을 내렸다. 글로벌 제약사인 길리어드가 같은 기간, 하루 한 알 복용으로 C형 간염 치료가 가능한 신약인 ‘하보니’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권 소장은 “우리가 개발하던 것보다 더 복용이 간편한 신약이 출시됐으니 더이상 돈과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없었다. 이 보다 더 나은 약을 개발하는데 투자키로 했다”고 말했다.
실패를 빠르게 인정한 것이다. 한미약품은 실패를 ‘연구 자체’의 실패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시기를 놓치는 것’도 실패다. 하지만 임 회장은 실패 자체를 갖고 질책한 적은 한번도 없다. “무의미한 실패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패에 대한 관용이 한미약품의 경쟁력이 된 셈이다.
◇목표는 크게…문샷 싱킹(moonshot thinking)
한미약품은 2009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한미약품의 실질적인 캐시카우 역할을 해오던 복제약(제너릭)과 단순 개량신약 개발을 전면 중단했다. 당시에 반대하는 주주들도 있었지만 임 회장은 과감하게 밀어부쳤다. 신약개발에 매진하기 위해 ‘돌아갈 배를 태워버린 것’이다. 약가 인하, 리베이트 쌍벌제 등 제약환경이 크게 악화된 시점이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한 도전을 하는 것을 최근의 경영학에서는 ‘문샷 싱킹’(moonshot thinking)이라고 한다. 달에 로켓을 보내려는 시도와 같이 거대한 목표에 도전하는 것이다. 임 회장은 글로벌 제약사 수준의 신약개발을 목표로 세웠다. 이를 달성하려면 ‘믿는 구석’을 남겨놔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 캐시카우를 과감히 버린 이유다. 주변에서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지만 한미약품은 최근의 메가딜을 통해 자신들의 판단을 입증했다.
◇효율적인 연구 포트폴리오
결정은 과감했지만 실행 과정은 스마트했다. 한미약품은 세계적으로 개발 중인 신약을 모두 모니터링하고 항암제, 면역질환 등 시장성이 높은 분야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두드렸다. 그 성과가 ‘퀀텀 프로젝트’다.
획기적인 신약개발이 어려운 제약업계에서는 만성질환 환자의 편의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기술개발이 화두였다. 권 소장은 “매일 인슐린을 맞아야 하는 당뇨병 환자가 1주일이나 한달에 한 번만 인슐린을 맞아도 정상적인 삶이 가능하다면 시장에서 신약개발 못지 않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마침 한미약품은 2004년부터 기존 약물에 특정한 물질을 붙여 바이오 의약품의 수명을 늘려줄 수 있는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었다. 기존 약물은 안전성이 입증된 만큼 랩스커버리 기술을 적용하면 임상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신약개발을 통한 실패 위험을 줄이는 선택이 글로벌 대박으로 연결됐다.
[동탄 = 김기철 기자 /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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