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지분 약화, 승계 분쟁 틈타 전면 나서
우리나라의 사모펀드(PEF) 등장은 IMF 위기 후인 2004년이다. 외국계 자본이 독점하다시피 한 구조조정 시장에 토종 자본의 진출을 허용하기 위해서다. 2004년 당시 총 4,000억 원 규모의 두 개 펀드가 결성되고 이후 20년이 지났다. 2023년 말 기준 출자 약정액은 136조 4,000억 원, 펀드 수는 1,126개이다. 출자 이행액도 98조 9,000억 원, 투자 회수는 18조 8,000억 원으로 제도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1 IMF 위기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도산했고 일부는 외국 회사나 사모펀드에 이른바 ‘헐값’으로 팔렸다. 2003년에는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1조 3,800억 원에 매각되었다. 론스타는 이후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외환은행을 3조 9,159억 원에 매각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론스타는 2012년 한국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 개입 46억 7,950만 달러를 손해봤다며 ‘투자자–국가분쟁 해결제도(ISDS)’를 통해 국제중재를 제기했다. 2022년 법무부는 ISDS 판정부가 론스타가 정부에 청구한 손해배상금의 4.6%인 2억 1,650만 달러(약 2,800억 원)를 지급 판정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이 ‘사모펀드 트라우마’의 시작이다.
#2 고려아연의 경영권 갈등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영풍에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참여하고, 이에 고려아연도 주가공개매수로 대응하자 주가는 뛰고 있다. 결국 주총에서 표 대결을 해야 하지만 양쪽 모두 과반에 미달이다. 또 약 7.5%의 주식을 갖고 있는 국민연금은 중립 태도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이 대결에서 특이한 점은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경영권 인수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동안 사모펀드의 스탠스인 경영권 참여를 통한 기업 가치 제고와 수익 확대 이후 투자 자본을 ‘엑시트’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일반적인 ‘바이아웃 투자’와는 결이 다르다.
#3 2023년 전 세계의 ‘행동주의펀드Activist hedge fund’의 운용자산은 4조 달러, 약 5,600조 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들은 투자 회사의 주가가 오르면 팔고 다음 기업을 찾는다. ‘맥킨지 앤 컴퍼니’에 따르면 2023년 사모펀드는 전 세계 8조 2,000억 달러. 세계적인 규모의 자산 관리, 연기금, 보험사, 대형 투자자들이 사모시장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현실이라 사모펀드 자산은 급증하는 추세이다.
사모펀드는 은둔의 실력자에서 이젠 전면으로 등장했다. 그것도 한 손에는 막대한 자금을, 또 다른 손에는 이익 추구라는 무기를 들고. ‘기업의 동반자’에서 이제는 ‘경쟁자’가 된 것이다. ‘3대가 내려가면 남이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지금은 3대가 아니라 당대에도 상속, 후계 문제로 기업 내 분쟁이 일어나는 실정이다.
사모펀드, 헤지펀드, 행동주의 펀드
‘사모펀드 PEF(private equity fund)’. 우리는 미디어에서 이 단어를 수없이 접한다. 하지만 그 뜻과 정체는 사실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모펀드는 소수 투자자에게 돈을 모아 주식, 채권, 부동산, 기업 등에 투자하고 운영하는 펀드이다. 여기서 구분이 필요한 것이 PE와 PEF이다. PEF는 ‘전문투자형 사모펀드’이고, 바로 이 펀드 운용사가 ‘PE’이다. PE사가 투자 계획과 운용 방법, 수익률을 계산해 상품을 만들면 고객들은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에 위탁해 펀드에 가입한다. 그러면 PE는 투자된 PEF를 주식을 사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에 걸쳐 운용하고 이를 되팔아 이익을 남기는 구조이다.
구분할 점은 PEF와 헤지펀드의 차이다. 두 펀드 모두 기관투자자, 개인 자산가를 대상으로 자금을 모집, 투자하는 구조, 수익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방법이 다르다. 헤지펀드는 경영권과 관계없이 수익 극대화에 우선점을 두고 주식, 채권, 외환, 원자재, 파생상품 등 유동성이 커도 투자를 한다. PEF는 기업 인수, 성장 동력 집중, 경영 목표의 확실성 등으로 기업 가치를 상승시켜 상장이나 성장 이후 수익을 올리는 구조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행동주의 펀드’는 또 다르다. 펀드운용사가 투자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이익을 추구한다. 이들은 의결권 행사, 집중투표 청구 등을 통해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구조조정 등을 요구, 단기간에 주가 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추구한다.
이미지 픽사베이
지금은 사모펀드, 헤지펀드, 행동주의 펀드 등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액티 바이아웃Acti-buyout 펀드’의 등장이 바로 그 예다. 이는 시장에서 바이아웃만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회사의 감소, 주가 하락 추세, 금리 인하 등으로 PEF의 생존전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업을 인수, 가치를 상승시키고 되파는 방식보다 기업의 지분을 확보해 배당 확대 등은 물론이고 ‘적대적 인수합병’을 하는 전략이 현재의 PEF이다. 영국의 거버넌스 리서치업체 ‘딜리전트마켓인텔리전스’는 2023년 한국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된 기업 수는 77개사로, 전년 대비 57% 늘어 미국 160개, 일본 103개에 이어 전 세계에서 3번째라고 밝혔다.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늘어난 요인 중 큰 것은 기업의 지배구조 약화이다. 기업 후계가 2세대를 거쳐 이제 3, 4세대 이어지는 과정에서 ‘오너 혹은 오너가’의 지분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사모펀드사가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기업은 오너의 지분율이 30% 이하, 오너가의 경영권 분쟁 기업, 막대한 상속세 납부를 고민하는 기업 등등이다. 물론 행동주의 펀드라고 전부 ‘악당’은 아니다. 이들은 경영 감시, 견제를 통해 주주의 이익 증대, 지배구조 개편 등을 실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행동주의 펀드의 시작은 2006년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설립한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 일명 ‘장하성 펀드’로 볼 수 있다. 이 펀드는 2012년 청산됐고 이후에는 ‘KCGI’ 일명 ‘강성부펀드’가 대표적인 행동주의 펀드로 떠올랐다. 이 펀드는 2018년 조원태 회장과 경영권을 두고 주종에서 표 대결까지 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늘어나는 것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중 큰 원인은 기업들의 지배구조 약화를 들 수 있다. 기업의 후계 구도가 창업자와 2세대를 거쳐 이제 3, 4세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각종 요인으로 인해 ‘오너 혹은 오너가’의 지분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국내 펀드사 약 310곳, PEF 1,080여 개, 설정액 134조 원
우리나라의 사모펀드 중 한앤컴퍼니, MBK파트너스, 스틱인베스트먼트, IMM프라이빗에쿼티(IMM PE), IMM인베스트먼트를 ‘탑5’로 부른다. 2023년 말 기준 약정액 1위는 한앤컴퍼니다. 13조 6,050억 원으로 세계 2위 자동차 열관리기업 한온시스템을 인수, 한국앤컴퍼니그룹(효성그룹)에 매각했고 이어 남양유업 경영권도 장악했다. 2위는 MBK파트너스 11조 8,413억 원으로 홈플러스, 롯데카드, bhc, 네파, 오스템임플란트 등에 참여했으며 현재 고려아연과 경영권 대결 중이다.
약정액 6조 4,758억 원인 스틱인베스트먼트 역시 뮤직카우, 쥬비스다이어트 등 다양한 기업에 투자했다. IMM PE의 약정액은 6조 4,710억 원으로 하나투어, 한샘, 미샤 등에 투자했고 약정액 5조 5,879억 원인 IMM인베스트먼트는 주로 벤처기업에 투자하고 있다.
사모펀드를 바라보는 시장의 시각은 두 가지이다. 투자를 통해 신성장 동력 발굴, 벤처기업 안정화, 적대적 기업합병의 지원군 역할을 하는 ‘백기사’, ‘해결사’, 그리고 또 다른 얼굴은 ‘기업 사냥꾼’, ‘약탈자’, ‘먹튀’ 등의 이미지다. 이는 기업을 싸게 인수해 구조조정 등으로 가치를 올려 비싸게 되팔기 때문이다.
이는 사모펀드 본연의 목적이 기업의 장기 생존전략, 미래 가치보다는 수익이 보장된 매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기업들이 사모펀드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나이브(naive, 순진한)했다’라는 자평도 있다. 이에 어떠한 성격의 펀드이든 ‘수익추구’가 목적이기에 이들이 ‘선하다, 악하다’ 평가를 하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또 하나의 사모펀드의 모습은 바로 ‘경영권 인수’이다. MBK파트너스가 한국앤컴퍼니,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에 참전하면서다. 그동안 사모펀드는 기업과 M&A 시장에서 협력했다. 해서 재계는 ‘사모펀드의 기업에 대한 경영권 공격 금지’는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사모펀드 발 ‘지배구조’ 변화를 목적으로 한 자본 참여가 잇달아 발생하면서 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이는 2021년 자본시장법 개정안, 즉 의결권 주식 10% 이상 취득, 취득 이후 6개월 이상 보유 등의 규제가 폐지되면서 PEF의 운용전략이 다양해졌고, 사모펀드로서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해졌다.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재벌가의 지분 약화 때문이다. 3, 4세로 기업승계가 되면서 오너의 지분 감소, 형제 간의 분쟁, 막대한 상속세로 인한 지분 매각 등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모펀드는 은둔의 실력자에서 전면에 등장했다. 그것도 한 손에는 막대한 자금을, 또 다른 손에는 이익 추구라는 무기를 들고. 이제는 기업의 ‘경쟁자’가 된 것이다. ‘3대가 내려가면 남이다’라는 말이 있다. ‘형제끼리 뭐 돈 가지고 싸우나’ 하겠지만 막상 그 돈이 ‘1조, 10조 원’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 틈을 이제 사모펀드가 파고 들고 있다.
※본 기사에 삽입된 이미지는 실제 사실과 관계가 없습니다.
[글 권이현(라이프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1호(24.12.3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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