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실향의 한(恨)을 술로 풀며 세월을 보냈다. 그 대신 어머니가 노점상으로 5남매를 키웠다.
초등학교 6학년 소녀는 춤을 출 때 가난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무용학원비가 없어 친구를 따라가 어깨 너머로 배웠다.
그런데 점점 욕심이 생겼다. 무용학원장(윤희준)에게 “이거 배우는 거 얼마에요”라고 당돌하게 물었다. 녹두 빈대떡과 튀김을 파는 초라한 행색의 어머니를 만난 원장은 학원비를 받지 않고 “그냥 보내세요”라고 허락했다.
그 배려로 춤을 체계적으로 배운 후 선화예술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느날 미국에서 온 발레 교사 애드리언 댈러스가 키가 큰 소녀를 찾아와 “발레 하지 않을래”라고 묻는 순간에 발레리나 삶이 시작됐다.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52)이 40년 발레 인생을 마감하는 무대에 선다. 오는 22~23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창단 20주년 공연 ‘빙(BEING·현존)’의 엔젤(천사) 역할을 춤 춘다. 남편이자 상임안무가 제임스 전 한국체대 교수(56)의 대표작으로 1995년 초연 때도 이 배역을 소화했다. 그동안 발레단 살림을 맡으라 무대에 서지 못했던 김 단장은 지난 6월부터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10년만에 무대에 서는 그는 “다시 춤을 추니까 온 몸에 비타민을 맞는 느낌이다. 땀 흘리고 난 후 피부가 좋아지고 몸이 너무 가볍다”고 말했다.
유니버설발레단(1984~1992년) 창단 멤버이자 수석 무용수,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1994~1995년)로 무대를 날라다녔던 그는 지난 세월을 돌이켰다.
“가정 형편은 힘들었지만 발레리나로서 다 누렸죠. 제 춤을 좋아해주고 응원해준 분들에게 무대에서 몸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마이크를 잡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했죠. 정말 감개무량하고 행복합니다.”
어머니의 희생과 스승의 은혜가 없었다면 그는 발레를 중단했을 지도 모른다. 댈러스 선생은 토슈즈를 사줬고,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장은 장학금을 선물했다. 어머니는 전세금을 빼내 유학 생활비를 부쳤다.
김 단장은 “내게 유학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며 회상에 잠겼다.
온갖 역경을 딛고 한국 대표 발레리나가 됐다. 유년 시절 한국 무용을 배워 ‘몸선이 길고 우아하다’는 극찬을 들었다.
전성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는 여전히 발레 앞에서 설렌다. 다행히 2년전 수술한 어깨도 괜찮아지고 고질병이던 무릎 연골 상태도 나쁘지 않다. 방황하는 청년을 이끌어주는 구원의 여신 배역이라 춤 동작이 격하지 않다.
“돌고 뛰는게 아니라 상체를 많이 움직이는 역할이라 큰 무리는 없어요. 정 안 되면 안무가(제임스 전)에게 부탁하면 되죠. 마음이 있어도 몸이 안 따라주면 공연하기 힘든데 아직까지는 좋아요.”
그와 제임스 전은 서울발레시어터 창단 후 20년 동안 고집스럽게 창작 모던 발레 작품을 만들어왔다. ‘빙’은 20년 전에 파격적인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요즘 다른 장르와 협업이 활발해요. ‘빙’은 이미 비보잉과 록 음악, 청바지 입은 무용수, 오토바이, 첨단 조명, 플라잉 기법을 등장시켰죠. 뚜껑 열면 별 것 다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이에요.”
이번 무대에는 비보이단 ‘갬블러크루’ 멤버 김기수, 힙합에서 파생된 크럼핑 댄스 그룹 ‘트릭스’ 멤버 김태현이 출연한다.
초대예술감독 로이 토비아스 안무작 ‘마음 속 깊은 곳에’, 초청안무가 허용순 작품 ‘그녀는 노래한다’, 리차드 월락의 ‘스닙샷’, 제임스 전의 ‘레이지’ 주요 장면도 공연된다.
창단 20주년 기념 페스티벌 ‘브라보 SBT’도 연다. 디지털 사진전시와 심포지엄을 통해 발레단 발자취를 더듬고 미래도 고민한다. (02)3442-2637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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