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물가 상승률이 1만%를 넘어서는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가 초고액권 지폐 발행을 준비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국제 사회 눈길을 끌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에 보관한 금을 돌려달라'는 취지로 제기한 항소 재판에서 일단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최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유엔 무대에 등장해 연설하는가 하면 코로나19 감염된 '앙숙'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특별한 위로 메시지를 보내는 등 튀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베네수엘라가 올해 안으로 새 지폐를 발행하기 위해 이탈리아 업체를 통해 지폐용 보안용지 71t을 사들였다고 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10만볼리바르부터 시작하는 새 지폐를 발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10만볼리바르는 지금까지 베네수엘라가 발행한 지폐 액면가 중 최고액이다. 다만 블룸버그는 이를 달러로 환산하면 0.23달러(약 270원)정도라고 전했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과 영국 중앙은행(영란은행)
베네수엘라에서는 지난 해 말 마두로 대통령이 경제를 살려보겠다면서 '시장 자유화'를 선언하고 내수 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사용'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바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번 새 지폐 발행이 베네수엘라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어떤 영향을 줄 지가 국제 사회 관심사다.석유 매장량1위 '자원 부국' 베네수엘라는 초 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의 나라다. '무역 적자·재정 적자·최저임금 인상·고액권 발행·인플레이션·화폐 액면가 평가 절하'가 악순환을 반복한다. 만성 무역적자로 대표되는 경제난과 포퓰리즘(인기에 연연하는 정책)이 맞물려 실물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살인적인 수준의 '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리고 고액권을 발행해왔다. 다만 이런 대응이 또다시 인플레이션을 키우면 화폐 평가 절하가 뒤따르는 식이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2017년 10만볼리바르 지폐를 발행했다가 이듬해 10만 대 1의 화폐 개혁을 단행하면서 당시 10만볼리바르를 1볼리바르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는 지난 2014년 연간 물가 상승률이 60%대를 찍어 전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다만 이후 2015년엔 세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했고 이후 폭등세가 지속되고 있다. 석유 수출에 의존하던 베네수엘라 경제는 2013년을 전후해 가파르게 기울기 시작했다. 석유 중심 경제 틀을 만든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사망하고 국제 유가도 급락하기 시작한 데다 후임 마두로 대통령의 무능과 실정이 겹친 탓이다.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대통령이 둘이다. 마두로 대통령 집권 후 국내 총생산(GDP)이 반토막 나고 시민들이 '엑소더스'(대탈출)을 벌이자 지난 해 1월 야권 대표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미국 지지를 받아 '임시 대통령'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마두로 대통령이 지난 2018년 5월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지만 야권이 부정 대선이라고 거세게 반발한 것이 계기다. 다만 두 대통령 정국 혼란이 1년 넘게 이어지는 가운데 올해 코로나19사태까지 겹치자 국제통화기금(IMF)은 베네수엘라 경제 성장률이 -15%를 기록하고 연간 물가상승율은 1만5000%에 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올해들어 마두로 정권은 국제 사회에서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단 5일에는 영국 법원으로부터 정권 정통성과 관련해 비교적 긍정적인 판결을 끌어냈다. 이날 영국 항소법원은 마두로 정권 산하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이 '영란은행에 맡겨둔 베네수엘라 소유의 10억 달러(약 1조 1612억원)어치 금 반출을 허용해 달라'는 취지로 영란은행에 제기한 항소 재판에서 마두로 정권의 손을 들어줬다.
마두로 정권은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 대응에 필요한 시민 구호·의약품 마련을 위해 금 인출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번 재판은 앞서 7월 하급심인 고등법원이 '영국 정부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과이도 의장을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영란은행은 마두로 정권하에 있는 중앙은행의 금 인출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취지로 마두로 정권 측 요구를 기각하자 항소가 이뤄진 데 따른 것이다.
이날 항소법원은 영국 정부를 향해 마두로 대통령이 아닌 과이도 의장을 모든 측면에서 적법한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인정하는지 여부를 명확히 해야한다고 주문했다. 스테판 메일스 판사는 판결문에서 "과이도 의장을 지지한다는 영국 정부의 성명은 영국이 지속적으로 마두로 정권과의 관계를 유지해온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다"면서 "지금의 상황은 다소 혼란스럽고 명백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영국과 유럽연합(EU)회원국들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과이도 의장 지지 성명을 내기는 했지만 베네수엘라 내에서 과이도 의장의 기반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마두로 대통령이 실질적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간 마두로 정부와 외교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국제 정치 무대에서는 모호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편 하루 전날인 마두로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발 코로나19에 감염돼 병원에 입원했던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특별한 위로를 건네 눈길을 끌었다. 4일 마두로 대통령은 "인간으로서 연대감 차원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트럼프 대통령의 빠른 회복과 건강을 기원한다"면서 "이번 고통을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이 더 사려깊고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 국제 사회를 이해하길 바란다"는 위로 메시지를 발표했다.
지난 2017년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공산주의 국가' 비난에 나서면서 베네수엘라와 동맹국을 집중 제재해왔다. 다만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달 23일 열린 유엔총회에 2년 만에 등장해 "미국은 세계 평화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한다"면서 트럼프 정부의 경제 제재를 비판하며 끝까지 맞서겠다고 열을 올리기도 했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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