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지난해 시판을 시작한 마취용 의료로봇이 의료비를 이전 보다 10분의1 값으로 ‘뚝’ 떨어뜨리는 혁신을 일으키고도 결국 퇴출당했다. 해당 로봇으로 일자리를 빼앗길 것을 우려한 의료진들의 집단반발에 밀린 결과이다.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으로 알았던 로봇이 되레 인간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생긴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세계최대 바이오·제약기업인 존슨앤존슨(J&J)은 지난해 출시했던 수면유도 마취 로봇인 ‘세더시스’(Sedasys)의 판매를 중단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세더시스’는 결장검사·내시경 검사때 프로포폴을 주사해 환자를 수면유도하는 마취용 의료로봇이다.
이 기기를 사용하는 환자는 한손에 공하나를 쥐고 헤드폰을 낀채 음성지시에 따라 반복적으로 공을 움켜쥐는 행동을 하고 시스템은 혈중산소함량, 심박수 등 환자의 신체징후에 따라 투약량을 조절한다. 일종의 인공지능(AI)과 유사한 컴퓨터화된 시스템을 통해 정상보다 혈중 산소함유량이 낮아지거나 심박수가 이상수준으로 떨어지면 바로 투약을 멈춘다.
전신 마취는 예전까지 마취과 의사·전문의료인만 허용됐던 의료행위인데 지난 2013년 미국의 식품의약국(FDA)가 세더시스 사용을 승인하면서 미국을 비롯해 호주·캐나다 등지의 병원에 지난해부터 보급되기 시작했다.
세더시스의 가장 큰 장점은 ‘살인적 수준’의 미국 의료비를 획기적으로 낮췄다는 것이다.
미국서 결장검사·내시경검사 등을 받을 때 수면내시경 의료비는 통상 2000달러에 달한다. 마취전문인력이 부족해 인건비가 상당히 비싸기 때문이다. 반면 이 로봇을 도입할 경우 해당 비용이 150~200달러 안팎수준으로 10분의 1로 크게 감소한다. 문제는 로봇의 일자리 침투 공포가 확산되면서 의료진들의 반발이 커졌다는 것. 미국에서 마취전문의들은 평균 연봉이 28만6000달러에 이르러 평균수입이 가장 많은 의료전문직에 속한다. 서민·중산층 입장에선 환영할만 했지만 마취전문의 협회 등은 대대적인 반대캠페인을 벌이고 정치권에 규제로비를 전개했다. 표면적 반대이유로는 “세더시스가 의도한 수면상태보다 더 깊은 수면상태를 유도를 하고 돌발사태 발생시 환자의 안전을 책임질수 없다”며 안전문제를 내세웠다.
반면 WP·WSJ 등 언론들은 지난해 직접 병원에서 운용되는 세더시스를 목격한 후 “기계가 실제 마취 전문의가 마취할 때 보다 더 엄격한 기준아래 작동된다”고 보도했다. 판매가 중단되자 의료계에선 “결국 안전문제 때문에 세더시스가 하차했다”고 말하고 있다.
반면 J&J 측은 “판매를 중단한 건 절대 안전문제가 아니다”며 “미래성장을 고려한 경영판단”이라고 밝혔다. 의료기업인 J&J는 병원이 가장 큰 고객 중 하나다. 의료계가 꺼리는 제품을 억지로 밀어 붙여봤자 다른 영업까지 타격을 받을게 뻔하다.
WP는 “세더시스는 한번도 인간 마취전문의들에게 환영받은 적이 없었다”고 보도했다. WSJ는 “세더시스는 인간의 일자리를 자동화로 대체하려는 기업이 직면할 수 있는 ‘후퇴’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며 “큰 수입원이 줄어들 위기에 처한 마취전문의들과의 싸움에서 패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도했다.
존슨앤존슨의 세더시스 퇴출사건은 인공지능과 로봇 등 제4차혁명으로 대두되는 패러다임의 변화 과정에서 인간이 맞딱드릴수 밖에 없는 갈등을 보여준다. 인공지능과 기계의 발달로 인해 이미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김진형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장은 “한국에서는 63%, 미국에서는 47%의 일자리가 인공지능과 기계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며 “기존 사회 구조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의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의료분야에서 기계의 적용은 1970년대부터 시작됐다. 김 소장은 “많은 사회적인 논의 결과 현재 의료분야에서 기계의 활용은 인간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로 집중되고 있다”며 “인공지능, 기계의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최종 결정은 인간이 내리는 시스템으로 완성되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IBM이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은 전 세계 5000여개 기업이 이를 활용하고 있다. 대부분 의료 빅데이터를 분석해 현재 환자의 상태와 최적의 치료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역시 의사의 판단에 도움을 주는 근거로 활용된다. 임춘성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 기조실장은 “우리 사회는 아직 인공지능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다”며 “소프트웨어의 발달은 기계·재료 등 다른 분야보다 월등히 빠른 만큼 새롭게 다가올 사회를 대비한 제도 개선, 법적 검토 등이 필요한 시기”라고 덧붙였다.
[이지용 기자 / 원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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