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끝난 뒤 법원 앞 카페에 앉아 쓰는 법원 출입기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때로는 소소하면서도 때로는 중요하지만 잊혀진 그런 법정 안팎이야기를 다뤄보려 합니다.
약 두달 전쯤인 지난 2월 1일 서울고등법원 413호 법정, 이날은 한 기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2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1심에 이어 2심마저 패소. 10억 원을 국가가 배상하라고 요구했지만 결국 한푼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선고 결과는 기업에 전달되지도 못했습니다. 법원은 2주가 지나도 기업이 선고 결과를 받아가지 않자 선고로부터 한 달 뒤인 지난달 1일 법원게시판에 선고 내용을 공시하는 등 방식으로 사실상 선고 결과가 전달된 걸로 간주하는 '공시송달' 절차를 밟았습니다.
이 기업이 선고 결과를 받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미 폐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도 받지 못하고 폐업해 버린 이 기업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규제 혁파" 첫 사례
시간을 거슬러 지난 2015년 5월 6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규제개혁장관회의가 열렸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는 한 기업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린스케일 설완석 대표였습니다.
이날 회의는 이름 그대로 규제개혁을 위한 논의가 목적이었습니다. 각 부처별로 산재한 규제 빗장을 풀어 창의적인 기업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취지였죠. 설 대표의 그린스케일은 규제개혁이 필요한 대표적인 사례기업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린스케일은 당시 이른바 '블루투스 전자저울'을 개발한 업체였습니다. 농산물을 전자저울로 측정하면 측정한 값을 블루투스로 스마트 기기로 바로 전송해 데이터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 저장하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린스케일은 이 데이터를 국가가 운영하는 농산물이력추적시스템과 연계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 실현된다면 농가에서는 전자저울에 작물을 올려 무게를 잴 때 동시에 생산과 재고파악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기대가 있었죠. 소비자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생산한 농산물인지도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 될 걸로 기대됐습니다.
그린스케일이 출시하려고 한 '블루투스 전자저울' 소개 (사진=미래창조과학부)
그런데 이 저울을 출시하려면 장애가 있었습니다. '농산물'이 관련돼 있고, 'IT기술'을 사용하는 데다 '저울'이라는 표준이 필요하다 보니 각각 농림축산식품부,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이 모두 관련돼 있어 허가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나선 박근혜 정부는 신속절차를 통해 블루투스 저울에 대한 '임시허가'를 내 줬습니다. 일단 먼저 허가를 줄 테니 임시허가 기간 동안 부처가 협동해 정식 출시될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해주라는 취지였습니다.
정부의 비협조, 그리고 폐업
지난 2015년 5월 6일 당시 청와대에서 열린 제3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규제개혁 점검회의. 박근혜 당시 대통령 오른쪽이 설완석 그린스케일 대표. (사진=연합뉴스)
2015년 10월 첫 1년짜리 임시허가를 받은 그린스케일은 이듬해 임시허가를 1년 더 연장했습니다. 연장된 허가기간은 2017년 10월까지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린스케일은 각 부처에 정식 출시를 위한 기준과 제도 마련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각 부처의 협조가 더뎠습니다.
먼저 계량과 관련한 기술 표준을 만들어야 하는 산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은 관련제도를 정비해달라는 그린스케일의 요청에도 승인기간이 끝날때까지 제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농산물 소관인 농식품부는 그린스케일의 블루투스 저울 데이터와 농산물이력추적시스템 연계를 허가해주지 않았습니다. 임시허가를 내준 주체인 과기부도 다른 부처에 협조요청을 하긴 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이끌어내지 못했죠.
지난 2018년 1월 22일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 혁신 토론회에서 앞에 놓인 '규제 샌드박스'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렇게 허가 기간이 끝난 채 정식출시에 실패한 그린스케일은 1년 정도 지난 2019년 1월 다시 정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번에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 샌드박스'였습니다. 사업자가 신기술을 시장에 우선 출시해 검증할 수 있도록 규제를 일부 면제하는 제도로 사실상 박근혜 정부의 규제특례와 큰 차이가 없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규제 없음' 즉 관련 규제가 없으니 자유롭게 시장에 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규제가 있으니 임시 허가를 받고 정식 출시를 위한 제도 정비를 해달라고 요구한 건데 답이 없다가 갑자기 '알아서 하라'며 지원대상이 아니라고 말이 바뀐 겁니다.
말로는 규제가 없다고는 하지만 관련 제도도 없이, 농산물이력추적시스템 연계 등 지원이 없이는 사실상 출시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임시허가를 받은 2015년부터 4년 간 정부의 협조를 얻지 못한 그린스케일은 빚더미에 앉았고 결국 2019년 5월 폐업하게 됐습니다.
재판에서 드러난 말바꾸기
설 대표는 결국 최후의 보루로 사법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지난 2020년 설 대표는 정부를 상대로 10억여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2년 간 진행된 1심 재판에서는 임시허가를 받은 뒤 각 부처가 어떻게 말을 바꿨는지 과정이 상세히 드러났습니다.
1) "검토해보겠다"
임시허가기간이 끌나갈 때부터 결국 끝난 직후까지 각 부처는 "검토해보겠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민간기업과 정부간 데이터베이스 연계는 보안 등 문제발생 소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할 사항입니다"
- 2016. 2. 농림축산식품부
"이해관계자 회의를 통해 지속 논의할 예정입니다"
- 2017. 10. 국가기술표준원
"보안상 문제 방지를 위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돼 개선·보완 여부 등을 관계부서와 협의하겠습니다"
- 2017. 11. 농림축산식품부
- 2016. 2. 농림축산식품부
"이해관계자 회의를 통해 지속 논의할 예정입니다"
- 2017. 10. 국가기술표준원
"보안상 문제 방지를 위한 추가 검토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최근 확인돼 개선·보완 여부 등을 관계부서와 협의하겠습니다"
- 2017. 11. 농림축산식품부
2) "안되겠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지원을 해줄 수 없다는 답변을 합니다.
"이력추적관리시스템은 보안상 이유로 민간 시스템과 연계가 불가능하였으며, 연계시키려면 정부예산으로 보안기능을 개선해야 하는데 그린스케일이 개발한 시스템은 실효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 2019. 9. 농림축산식품부
"전자저울 데이터 통신의 형식승인 기준 신설 필요성을 검토하였으나 불필요한 규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기술기준을 신설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 2019. 10. 국가기술표준원
- 2019. 9. 농림축산식품부
"전자저울 데이터 통신의 형식승인 기준 신설 필요성을 검토하였으나 불필요한 규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기술기준을 신설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 2019. 10. 국가기술표준원
3) 다른 부처 탓
임시허가를 줄 때 협조하라던 각 부처는 정작 다른 부처 탓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술과 서비스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으로 과기부의 후속조치가 필요한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설 대표의 요청에 따라 검토를 했으나 시간이 늦어졌습니다. 규제를 만드는 입장에서 이해관계자 의견수렴은 당연한 것이니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 2018. 11. 국가기술표준원 연구사가 설 대표에게 보낸 메일
"2015년 과기부의 검토 요청에 답변하지 않은 것은 농식품부 소관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임시허가 이후 과기부로부터 이력추적관리시스템과 관련한 협조 요청을 받은 바도 없습니다"
- 2019. 9. 농림축산식품부
- 2018. 11. 국가기술표준원 연구사가 설 대표에게 보낸 메일
"2015년 과기부의 검토 요청에 답변하지 않은 것은 농식품부 소관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임시허가 이후 과기부로부터 이력추적관리시스템과 관련한 협조 요청을 받은 바도 없습니다"
- 2019. 9. 농림축산식품부
"위법은 아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1심 법원은 임시허가 기간 내에 그린스케일의 정식 허가를 위한 조치를 부처가 하지 않은 게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린스케일은 국가기술표준원장에게 사업 관련 제도화 기반 마련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지 문의했으나 답변을 듣지 못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기술표준원장에게 임시허가 유효기간 내 관련 법·제도를 정비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국가기술표준원장은 기간 내에 조치를 하지 않았다"
- 1심 법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기술표준원장에게 임시허가 유효기간 내 관련 법·제도를 정비해달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국가기술표준원장은 기간 내에 조치를 하지 않았다"
- 1심 법원
그럼에도 1심 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위법은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관계법령에 따르면 임시허가에 수반되는 후속조치로서 정식허가 등의 절차 또는 관계부처가 임시허가와 관련하여 취해야 할 법령상 조치나 의무에 관한 정함이 없다"
"담당공무원들이 적극적인 지원조치에 나아가지 않았다거나 관계부처에 강제수단을 행사하지 않았다는점, 공무원들이 정식 사업화를 위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았다거나 그린스케일이 요구하는 제도 정비 또는 시스템 연계조치 등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는 공무원들의 법령 위반을 인정하기 어렵다"
- 1심 법원
"담당공무원들이 적극적인 지원조치에 나아가지 않았다거나 관계부처에 강제수단을 행사하지 않았다는점, 공무원들이 정식 사업화를 위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하지 않았다거나 그린스케일이 요구하는 제도 정비 또는 시스템 연계조치 등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는 공무원들의 법령 위반을 인정하기 어렵다"
- 1심 법원
정부의 정책 판단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전과 말이 바뀌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임시허가 제도가 불명확성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인 점에 비추어 규제와 관련된 정책적 판단이 종전과 달라질 여지가 충분히 있다"
"관계부처가 밝힌 종전의 답변과 다소 상충되는 취지의 답변을 한 바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행위가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객관적 주의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 1심 법원
"관계부처가 밝힌 종전의 답변과 다소 상충되는 취지의 답변을 한 바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행위가 공무원에게 요구되는 객관적 주의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 1심 법원
2심 패소와 확정
서울고등법원 (사진=연합뉴스)
설 대표는 곧바로 항소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지난 2월 1일, 2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민사7부(강승준 부장판사)는 설 대표의 항소를 기각하고 다시 정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심 법원 역시 '관련법이 없기 때문에 말이 바뀌더라도 위법은 아니다'라는 1심 판단을 인정했습니다.
"관계부처가 임시허가와 관련해 취해야 할 법령상 조치나 의무에 관한 규정이 없는 이상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
"관계부처가 종전의 답변과 상충되는 취지의 답변을 한 바 있다고 하더라도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불 수 없다"
- 2심 법원
"관계부처가 종전의 답변과 상충되는 취지의 답변을 한 바 있다고 하더라도 위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불 수 없다"
- 2심 법원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한 설 대표는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고, 결국 지난달 16일 2심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이래서 '규제혁파' 믿겠나
"미래창조과학부는 '신속처리 및 임시허가' 제도의 첫 번째 사례로 '블루투스 통신을 활용한 이동식 전자저울 기술 및 농업 모바일 서비스'에 임시허가를 부여했다."
"새로운 융합 기술·서비스 등에 대한 적합한 기준·규격·요건 등을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미래부가 관계부처를 통해 확인하고 규제완화를 위해 임시로 허가·승인·등록·인가 등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신기술 및 서비스의 빠른 시장진입이 가능토록 지원함으로써 국내에 새로운 융합 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고 역동적인 창조경제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새로운 융합 기술·서비스 등에 대한 적합한 기준·규격·요건 등을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미래부가 관계부처를 통해 확인하고 규제완화를 위해 임시로 허가·승인·등록·인가 등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신기술 및 서비스의 빠른 시장진입이 가능토록 지원함으로써 국내에 새로운 융합 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고 역동적인 창조경제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당시 그린스케일에게 임시허가를 내주며 미래창조과학부가 낸 보도자료의 내용입니다. '관계부처'가 협조해 '규제완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죠. 하지만, 현실은 정식 출시도 못하고 맞이한 폐업이었습니다.
법을 위반한 건 아니라 배상 책임은 없지만 '임시허가 기간 내에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법원이 인정했습니다. 정부의 주장대로 '실효성이 높지 않고' '불필요한 규제'가 될 수 있어서 조치를 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 답변을 임시허가 기간이 끝나기 전에 했다면 해당 기업은 더 빨리 대응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어느 쪽이 맞든 정부의 장밋빛 보도자료와 대조되는 기업의 결말이 씁쓸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우종환 기자 woo.jonghwa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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