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충분히 시간이 흐르고 나면 과학 분야에서도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끓는 것으로 비유를 하자면 100도가 되면 노벨상이 나오는데 지금은 99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올해 노벨화학상의 유력후보로 꼽혔던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는 지난 6일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현 교수는 정보분석 서비스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선정한 노벨상 후보 명단에 국내 과학자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려 기대를 모았다.
현 교수는 실제 노벨화학상 발표가 나기 전부터 자신의 수상 가능성을 희박하게 전망했다. 그는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후보 명단에 들었다고 해도 그 해에 바로 노벨상을 받는 경우는 굉장히 희귀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노벨상을 받지 못했어도 현 교수가 노벨상 유력 후보로 거론된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화학계 최고 반열에 오르다
먼저 현 교수는 "사실 나노입자와 관련된 분야에서는 인정을 받고 이름이 알려져 있던 상태였지만 이번에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전 세계의 화학 전체 분야에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라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라고 밝혔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의 '웹 오브 사이언스'는 과학기술분야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데이터베이스기에 현 교수가 세계 화학계에서 명실상부 최고 반열에 들어섰다는 점이 공표된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 수준의 향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현 교수는 "이번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후보 명단 발표를 통해 적어도 나노 분야에 있어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독일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일본은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RIKEN)을 설립하는 등 과학에 대한 투자를 한 지 오래됐지만 우리나라는 이를 벤치마킹한 기초과학연구원(IBS)이 들어선지 약 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노벨상 수상은 '제2의 한강의 기적'
현 교수는 우리나라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일컫는 '한강의 기적'에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을 비유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받는 것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우리나라 과학자가 노벨상 후보군으로 꼽히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지다보면 언젠가는 노벨상을 실제로 받을 날이 올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현 교수는 나노입자를 비롯한 다양한 나노소재를 제조하고 이를 의료분야나 에너지 분야 등에 응용하는 방법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 교수는 균일한 크기의 나노입자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발표해 산업계 등에서 나노입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도운 공로를 받는다.
그는 2001년에 실온에서 온도를 서서히 올리는 방식(승온법)으로 균일한 나노입자를 바로 합성할 수 있는 방법을 담은 논문을 미국화학회지(JACS)에 게재했고, 2004년에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 머터리얼스(Nature Materials)'에 값싸고 환경친화적인 화합물으로 균일한 크기의 나노입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논문을 실었다. 현 교수의 이 논문들은 산업계에 적용이 불가하다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처음에 균일한 나노입자가 만들어진 전자현미경 사진을 받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해당 연구는 현재 삼성 QLED(양자점발광다이오드) TV 개발의 토대로 활용되기도 했다.
현택환 교수. [이승환 기자]
고2때 화학자 꿈...40년 한우물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출신인 현 교수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과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군에서 주최한 과학경시대회에 나가 은상을 받고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중에서 화학자가 돼야겠다는 결심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하게 됐다고 말했다.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현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에 입학하는 등 오로지 '화학' 한 길만 걸었다.
그 중에서도 나노입자와 관련한 연구에 매진하게 된 것은 현 교수의 '개척정신'과 '도전정신' 때문이다. 현 교수는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고서는 박사할 때 연구했던 테마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 당시 떠오르고 있던 분야가 나노 분야였고 실제로 연구를 해보니 상당히 흥미롭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현 교수는 그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제자들을 떠올렸다. 그는 "학생들에 아이디어를 전달하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더하면서 새로운 결과물을 얻고 그 논문들이 세계적인 저널에 발표가 되는 순간이 기억난다. 또 좋은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좋은 연구 결과를 지속적으로 내는 것 또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현 교수에게도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 그는 "박사과정을 밟던 3년 동안 정말 열심히 연구했는데도 주목할 결과가 나오지 않아 고통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다만 그때 현 교수는 꾸준히 새로운 논문을 읽는 버릇을 들였다. 그 버릇은 현 교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자산이 됐다.
노벨상의 조건 '자율'
현 교수는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에게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결국 '과학적 창의성'이라는 것은 자유로움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새로운 규제를 만들거나 법을 만들어서 계속해서 과학자들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사태를 언급하면서 현 교수는 앞으로 과학이 우리 삶에 차지하는 영향이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에서도 확인했듯이 바이러스가 어떻게 발생하고 전파되는지 등 모두 과학에 기반한 것이고 과학에 기반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며 "모든 사람이 과학자들이 될 필요는 없지만 과학과 과학자는 우리 삶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탄탄한 기초과학이 있어야 응용연구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실제로 현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공대에 부임했다. 그는 "중요한 응용은 아주 튼튼한 기초과학에 바탕을 둬야 한다고 본다. 기초과학이라는 배경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응용연구도 굉장히 재밌게 할 수 있었다"며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을 구분해서 따로 접근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자연대와 공대 등 일부 학과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의과대학 등으로 유출되는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현 교수는 "과학 분야에 우수한 인재들이 안 오게 되는 현재 상황이 안타깝다"면서 "과학자들도 제대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이 돼야 하고, 과학자들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를 해야겠다는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전했다.
"후배들 시행착오에 좌절하지 말라"
저명한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제2의 현택환' 세대에게 현 교수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빠르게 발견하고 이에 매진하기를 추천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좋아하는 것을 하면 열심히 하고 그러다보면 잘하는 것이 따라오게 된다"며 "좋아하는 것들을 빠르게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조언했다. 또한 시행착오를 겪고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 좌절하지 말기를 바랐다. 그는 "학생들에게 '1년 365일 중에서 15일 정도만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최고의 과학자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데, 실패를 경험하고 문제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기에 좌절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현 교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특히 그동안 연구했던 것과 앞으로 진행할 연구에서 나오는 성과들을 의료계에 적용해 새로운 치료제 개발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이 그의 복안이다.
현 교수는 앞으로도 꾸준히 자신이 좋아하는 연구를 즐기고 열심히 할 생각이다. 그러다보면 결과는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벨상 유력 후보로 꼽힌 전후가 별로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꾸준하게 제가 좋아하는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제가 해왔던 연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굉장히 큰 보람일 것 같습니다."
[박윤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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