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자취를 하는 권모(20)씨는 지난해 10월 30일 오후 8시 광주시 동구 지산동의 한 식당에서 계산대 위에 손님이 놓고 간 체크카드를 훔쳐 달아났다. 그는 카드로 3차례, 총 18만5000원어치를 결제했다가 경찰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권씨는 범죄사실을 순순히 자백하면서 "배가 고파서 카드를 훔쳐 썼다"고 말했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최저 임금을 받으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
# 폐지 수집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김모(75) 할아버지는 지난해 3월 서울 서초구 방배천로 주택가를 지나다 문 앞에 놓여 있는 택배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값비싼 물건 같아 순간 유혹을 느껴 훔쳤지만, 포장을 뜯고 보니 2만원 어치 생활용품이었다. 집주인의 신고로 붙잡히 김 할아버지는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다행히 경찰은 김 할어버지가 범죄 전력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 형사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경기 침체로 '생계형 경범죄'를 저질러 경찰서에 끌려오는 21세기형 '장발장'이 여전히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가 우발적으로 선을 넘어 경찰신세를 지게된 사람들이다.
10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인 2016년 3월 8일부터 11월 30일까지 전국 142곳 경찰서에서 '경미범죄심사위원회'를 운영한 결과, 경범죄로 형사입건대상이 된 1469명 중 1375명은 즉결심판으로 감경했으며 즉결심판에 해당한 972명은 훈방 조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의 이 같은 조치로 이들은 전과자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 즉결심판(2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해당하는 사건)이나 훈방 조치가 되면 범죄경력(전과)이 남지 않는다. 만약 이들이 형사입건돼 기소됐다면 소설 속'장발장' 꼴이 났을 수도 있다.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평생 '전과자' 낙인이 찍혀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
경미범죄심사위원회는 경찰이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장발장'들을 구제해주기 위한 취지로 지난해 3월 설치됐다. 단순 절도나 무전취식 등 가벼운 범죄를 저지른 경범죄 사범을 심사해 피해 정도와 죄질 등 사유에 따라 처분을 감경해준다. 경찰청 관계자는 "단순 절도 등 순간적인 실수로 죄를 짓게 되었을 때 처벌해서 전과자를 만드는 대신 반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웃의 물건을 훔치거나 대형마트에서 음식물을 훔치는 경범죄는 경제적인 원인이 가장 크다. 중장년층 뿐만 아니라 최근 청년들도 취업난으로 생활고를 겪으면서 생계형 범죄로 내몰리고 있다. 대구 수성구의 한 마트에서는 지난 2일 30대 남성이 새해 떡국을 끓여먹기 위해 떡국용 떡과 만두 등 2만5000원 어치의 식료품을 훔치다 붙잡혔다. 광주에서는 결혼할 아들 상견례에 참석하기 위해 9만 9000원 상당의 겉옷을 움친 50대가 붙잡혔다.
조호대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생활고와 생계형 범죄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보니 경찰 등 사법기관에서도 이런 경범죄에 대해서는 원칙을 고수하기보다 일부 참작을 하는 게 사회 안정에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해 경미범죄심사위원회에 올라온 형사 입건자 1469명 가운데 단순 절도가 858건(58%)으로 가장 많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충동적으로 편의점이나 식당 등에서 물건을 훔치는 사례들이다. 다른 사람이 잃어버리거나 두고 간 물건을 가가는 '점유물이탈'이 163건으로 뒤를 이었고 사기 45건, 폭행 48건 등으로 순으로 나타났다.
[서태욱 기자 / 양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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