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덕이 선대의 성왕만 못하고 다스림도 잘하지 못해 3월 24일에 흙비가 내리는 천변이 있었으니 그 허물은 백성이나 신하에게 있지 않고 단정코 나에게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중)
국정을 돌보지 않던 ‘폭군’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흙비가 내린 3월의 어느 날이다. 여기서 말하는 흙비는 ‘황사’를 뜻한다. 옛 선조들이 황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이 시작됐지만 동시에 흙먼지를 일으키는 황사도 따라왔다. 특히 올해는 봄이 시작되기도 전인 2월말에 전국을 흙먼지로 뒤덮으면서 그 ‘존재감’을 미리 과시했다.
‘봄의 불청객’ 황사는 지금뿐 아니라 옛날에도 많이 신경쓰이는 존재였다. 황사가 발생하면 임금과 위정자들은 정치를 잘못하거나 부덕한 것에 대해 하늘이 벌하는 것으로 여겨 근신하면서 풍악과 음주를 금하기도 했다. 성종 9년 4월에는 흙비가 2차례 내리자 대사간 김자정이 백성들이 근신하고 반성하는 차원에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할 것을 임금에게 권고해 일부지역에서 금주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황사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1145년에 쓰여진 삼국사기다. 신라 아달라왕 21년(174)에 ‘雨土(흙비)’라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다음 백제에 “서기 379년 5월에 하루 종일 흙이 비처럼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겨울황사에 대한 기록도 나오는데, 644년 11월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붉은 빛이 도는 눈이 내렸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선조들이 사용하던 ‘흙비’란 용어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황사’로 바뀌었다. 당시 기상관측을 하던 일본인들이 기록에다 중간중간 손으로 적은 ‘황사(黃砂)’ 란 단어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굳어진 탓이다.
2000년대 들어와서 중국에서 급격한 산업화와 사막화가 이뤄지면서 단순한 모래폭풍이었던 황사는 유해 미세먼지까지 갖춰진 ‘노란 게릴라’가 됐다. 황사에는 일산화탄소, 중금속 등과 발암물질을 포함한 오염물질이 섞였다. 모래 자체는 토양에 해롭지 않지만 재와 그을음, 중금속 등 오염물질은 사람에게 치명적이다.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한국, 일본 순으로 황사 피해를 많이 입는다. 주로 우리나라의 황사는 봄철에 출현하고 4월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지만 점차 빨라지는 추세다. 기상청 관계자는 “올해는 황사가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적을 것으로 예측되지만 3월에 슈퍼황사가 올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원요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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