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서거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PK(부산·경남 지역) 맹주’였다.
유신정권 시절인 1979년 김 전 대통령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PK 지역은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한 ‘부마항쟁’을 통해 유신정권에 대항했다. 부마항쟁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진 사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면서 유신정권은 막을 내렸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도 김 전 대통령은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 각각 73.3%, 72.3%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따돌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과 함께 국회의원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PK 맹주’의 대가 끊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보궐선거(대구 달성군)를 통해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TK(대구·경북) 지역과는 달리 PK 지역은 김 전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과 함께 맹주를 잃었다.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금에도 많은 이들이 호시탐탐 ‘PK 맹주’를 노리고 있다. 특히 부산 영도구가 지역구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PK 맹주’라는 타이틀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YS의 정치적 아들’을 자처하며 김 전 대통령 상주 역할을 도맡고 있는 김 대표가 ‘PK 맹주’라는 타이틀을 얻으면 대선 후보로서의 중량감이 더해질 수 있다. 내년 총선에서도 PK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YS의 뒤를 잇는 ‘맹주’타이틀은 시간이 흐를수록 득표율을 높이고 있는 야권을 견제하는 데 꼭 필요한 카드다.
김 대표는 이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 빈소에서 “정치적인 의미는 없고 개인적인 인연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김 전 대통령의 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 기반이 탄탄한 호남과 달리 PK는 지난 18대 총선에서 낙동강벨트가 야권에 일부 잠식되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등장으로 야권의 색깔이 점차 짙어지고 있다는 여권 내부 분석이 나오는만큼 PK 민심을 잡는 것이 김 대표와 새누리당으로선 절실한 상황이다. 이정희 한국외대 교수는 PK 지역 민심에 대해 “부산·마산 지역은 오래 전부터 정권에 대한 반대 기운이 상당히 강했던 지역”이라며 “이같은 야성 덕분에 노 전 대통령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 대표 역시 김 대표와 마찬가지로 PK가 지역구(부산 사상구)다. 문 대표는 지난 22일 김 전 대통령 빈소에서 “(경남) 중·고교 선배이시면서 (경남 거제) 동향 선배이고, 민주화운동 인연도 있다”는 말로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문 대표는 지난 10월 부산 사상구 지역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PK 맹주’라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는 모양새지만 탄탄한 지역 기반이 대선 승리를 위한 필수조건인 만큼 ‘PK 민심’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문 대표는 야당 최초의 지방 싱크탱크인 ‘부산 오륙도연구소’를 설립하며 PK 지역 교두보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이미 김 전 대통령을 끌어안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관계자는 “2012년 대선 당시 문 대표가 상도동 예방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이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형식의 지지 선언이 성사단계까지 갔지만 오히려 우리 쪽 내부 이견으로 불발됐다”며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 강조에 나섰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양김(兩金) 시대가 저물면서 지역적 맹주라는 타이틀 역시 의미가 많이 퇴색됐다”면서도 “탄탄한 지역 기반 없이 정치 무대에서 성공할 수 없는만큼 이 지역을 둘러싼 여야의 싸움이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변수는 많은 정치인들이 김 전 대통령 뒤를 이어 ’PK 맹주‘를 노렸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는 점이다.
1992년 문민 정부 출범 직후 ‘PK 맹주’ 후계자를 노렸던 인물은 ‘3당 합당’을 거부하고 꼬마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던 이기택 전 의원이었다. 이 전 의원은 부산 지역에서만 다섯 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했지만 1996년 15대 총선 당시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 해운대구·기장구 갑에서 낙선했고, 이후 16·17대 총선에서도 낙선하며 국회 복귀에 실패했다.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혔던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 역시 PK 민심을 얻는데 실패했다. 11대 총선부터 부산 서구, 사하구 등에서 5선에 성공한 서 전 장관은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국회의원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경남 김해 출신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16대 대선 당시 부산, 경남지역에서 선전했음에도 각각 30%, 27% 득표율을 얻는데 그쳤다. 이밖에 박찬종·박관용·김정길 전 의원 등도 한 때 부산 맹주로의 도약을 꿈꿨던 정치인들이었다.
[정석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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