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으로 성희롱과 성추행을 포함한 성폭력 사건들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는 가운데 유통업계도 예외가 아니란 지적이 나온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또는 유통사와 협력사 간의 갑을 관계가 여느 업체보다 명확한 데다 브랜드 입점이나 홈쇼핑 방송출연 여부 등을 결정하는 '갑'에게 휘둘릴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26일 유통업계와 서울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여직원이 많은 유통업체 특성상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일반적이고 사건이 불거질 경우 신상이 빠르게 돌아 관련 사건 제보가 많지 않은 게 현실이지만, '권력'과 분명한 상하관계를 내세운 성폭력은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말 가구업체 한샘의 성폭행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신입 여직원이 화장실 몰래카메라와 성폭행을 당했지만 회사 측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해당 여직원은 회사 측의 권유에도 사직했으며 가해 남성들을 재고소할 방침이다.
유통업체에 종사하는 A씨는 상사의 성희롱에 못 이겨 최근 퇴직했다. 근무를 시작한지 7개월 만이다. 상사가 회의 중 책상 아래에서 발로 자신의 다리를 쓸거나 '서 있어보라'고 시킨 뒤 대놓고 다리를 훑어봤다. 상체를 숙이다 고개를 들면 상사와 눈을 마주치기 일쑤였다. 바지를 입기 시작하자 "화장하고 다녀라", "치마 입고 다녀라"고 대놓고 요구했다.
판매직으로 근무하던 B씨 역시 1년도 되지 않아 퇴직했다. B씨의 상사는 카카오톡으로 야한 사진과 야한 내용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보냈고 "뽀뽀 한 번 하자"고 요구했다. 정식으로 항의하자 상사는 "악수하자"며 끌어당겨 입을 맞추며 가슴을 만졌다.
프랜차이즈업체 회장의 비서로 일하는 C씨는 지속적인 성추행에 노출됐다. 회장은 집무실로 불러 C씨의 손과 허리, 엉덩이를 만지거나 등을 쓰다듬었고 강제로 무릎에 앉히기도 했다. 의전을 하면 연봉을 올려주고 헬스장 정기권도 끊어주겠다고 했는데 의전은 여자친구처럼 행동하란 의미였다는 게 C씨의 주장이다.
성희롱 예방교육 현장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D씨에 따르면 교육 중 상사가 남·여사원에게 과도한 상황극을 시키면서 "옛날에는 여자 배 위에 올라타는 게 소 등에 올라타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요새 남자들은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거래나 고용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 성희롱 발생 빈도는 더욱 잦았다.
대형마트에서 파견직으로 근무하는 E씨는 본사 관리직으로부터 "밤에 둘이 따로 보자"는 요구를 받았다. E씨가 거절하자 해당 직원은 "다들 내게 잘 보이려고 하는데 넌 내가 기회를 주는데도 왜 그러느냐"고 핀잔을 줬다.
홈쇼핑 방송 영상을 제작하는 대행사에서 근무하던 F씨는 최근 퇴직했다. 홈쇼핑 관계자, 업체, 대행사가 모두 모인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이 있었지만 상사는 사건을 덮길 요구했으며 해당 업무에서 F씨를 제외시켰다. 항의하자 "네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해에는 홈쇼핑 기술감독들이 여성 쇼호스트의 노출 부위를 클로즈업해 촬영한 뒤 몰래 돌려본 일로 자진퇴사한 사건도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바이트생도 성희롱에 자주 노출된다. 편의점주가 원조교제를 권하거나,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손님이 술시중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피의자가 검거된 강제추행 사건 중 피의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고용자와 피고용자, 동료 등 직장 내 관계인 사건은 지난 2013년 948건에서 지난해 1481건(잠정치)으로 늘었다. 직장 내 성추행은 2차 피해가 두렵고 권력 관계를 바탕으로 해 거절이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황현숙 서울여성노동자회 부회장은 "직장에서 성희롱·성추행 문제 발생 시 일반적으로 인사팀 담당자가 주로 사건을 맡는데, 이들 역시 회사 소속이기 때문에 상사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고 전문 교육이 부족해 2차 피해가 야기될 수 있다"며 "따라서 무조건 회사 내에서 해결하려 들지 말고 외부 전문가를 위촉하거나 외부 성자문 위원회를 만들어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성문제 가해자가 사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고도 성문제를 일으킨 주범이 됐던 만큼 현 예방 교육의 실효성 역시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며 "고용노동부 등 정부가 나서서 성희롱 예방수업 내용과 절차, 이수 기록 등을 체계적으로 파악·관리하는 국가적인 감시 시스템이 작동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 배윤경 기자 / 김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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