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해양플랜트 기업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엔지니어 최 모씨.
젊은 시절을 불태운 현대중공업의 추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사원이던 1990년대초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던 수천억원 규모 해양프로젝트를 현대중공업이 수주했고, 밤을 세워 설계에 매달렸다. 세계 최고가 그의 눈 앞에 있었다. 그러나 설계파트를 찬밥대우하는 현실에 최 씨는 16년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그는 “회사는 외형을 키우는 생산, 제작에만 관심이 있었지 설계 능력을 키우는 것은 늘 뒷전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해양플랜트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최씨는 다른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을 거쳐 중소기업에 자리를 잡았다. 50대 중반인 최 씨의 인생은 한국 조선업계의 부침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뛰던 최씨가 이제는 일자리 걱정을 해야할 처지로 내몰렸다.
한국경제의 기둥 역할을 해온 조선, 철강, 해운, 석유화학 등 이른바 중후장대형 산업이 날개없는 추락을 경험하고 있다. 1960~1970년대 경제개발계획의 핵심이었던 중후장대산업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워갔다. 그러나 성장 스토리에 취한 기업과 정부가 미래 대비를 게을리 하면서 이제는 존립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해운·철강·석유화학 등 4개 업종 14개 대기업 매출은 2012년 404조 4000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3년 만인 2015년에 24.3%가 감소한 306조 3000억원에 그쳤다. 매출 100대 기업 중 이들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2011년 30.0% 에서 2015년 20.5% 로 하락했다.
한 때 수출 최고 효자산업이었던 조선업은 전례없는 불황에 신음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선업에 본격적으로 도전한 우리나라는 2000년 수주잔량(클락슨 기준) 세계시장 점유율이 31.4%를 기록, 일본(26.5%)을 누리고 세계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영광을 누린 기간은 너무 짧았다. 중국은 지난 2009년 기준 수주잔량 점유율이 35.2%를 기록하면서 우리나라(31.4%)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불과 9년만에 1위 자리를 내준 셈이다. 일본이 세계 1위를 누린 기간은 44년이다. 이보다 앞서 세계 선박시장을 장악했던 유럽은 18세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수백년 동안 세계 선박 건조량의 70~80%를 차지해왔다.
조선업 뿐만 아니다. 대표적인 중후장대 산업인 철강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세계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았다. 세계철강협회에 따르면 조강생산량 기준 한국 철강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1997년 5.3%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계속 하락해 지난해에는 4.3% 까지 하락했다. 제대로 꽃을 피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중국경기 침체로 동부제철 등 철강기업들이 쓰러졌다.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글로벌 해운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은 굳건했다.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선사를 의미하는 컨테이너선사 상위 10개사에 한국 회사는 두 곳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기준 10위를 기록하던 현대상선은 2016년 14위로 떨어졌고, 7위이던 한진해운은 8위로 한단계 낮아졌지만 법정관리 위기에 직면해있는 상황이다.
석유화학 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0년대 민간 기업들이 진출하며 세계시장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석유화학산업은 2015년 현재 세계 4위(5.2%)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수출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서 밀리기 시작하는 제품들이 늘면서 범용제품 생산에 의존하는 국내 기업들의 미래 전망엔 빨간불이 켜졌다. 더 큰 문제는 업황이 좋다보니 지난해 잠깐 나왔던 구조조정을 말하는 논의마저 사라져버린 것.
중후장대산업의 위기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89년 8월 정부는 조선산업 합리화대책을 발표했다. 당시 대책을 보면 공적자금 투입 규모만 다를 뿐 기본 골자는 최근 조선업 구조조정 방식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차일피일 구조조정을 미루는 사이에 위기는 더 큰 재앙이 되어 돌아왔다. 30년째 똑같은 방식의 구조조정은 산업의 자생력을 꺾어버렸다는 지적이다.
강철규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이익이 나면 기업이 가져가고 손실이 나면 사회와 국가에 떠넘긴‘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 때문에 구조조정이 실패했고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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