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광운대 교수, 학술지 '역사와현실'서 주장
김인호 광운대 교수가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내는 학술지 '역사와현실'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정몽주의 신화화와 역사소비'에서 정몽주가 후대에 충절의 상징으로 신화화됐으며 그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허구로 판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려 후기에 조선 건국 세력과 대립하다 목숨을 잃은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는 충절과 의리를 지킨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주자학 보급에 기여한 삼은(三隱) 중 한 명으로, 빈민 구제와 교육 진흥을 도모했습니다. 하지만 1392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됐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는 "정몽주가 죽은 장소는 자신의 집 근처 태전동으로 추정된다"며 "16세기 후반에 최립이 지은 시에 선죽교가 정몽주 사망 장소라고 처음 등장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교수는 선죽교가 정몽주 살해 장소로 변모한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착한 대나무 다리'라는 선죽교 의미와 조선시대에 유행한 중국 고사 중 죽은 군주를 위해 다리 아래에 숨어 암살을 시도한 자객 예양(豫讓) 이야기가 결합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선죽교 설화는 중국 고사를 누군가가 결부함으로써 더욱 극적인 이야기가 됐다"며 "조선 후기 선죽교는 신성한 곳으로 국가의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고 덧붙였습니다.
김 교수는 정몽주가 지었다는 시로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도 실제 그의 저작인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단심가'가 문헌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사례가 1617년 간행된 '해동악부'라고 소개하면서 1439년 편찬한 정몽주 문집 '포은집' 초판에는 이 시가 수록되지 않았고 1719년 정몽주 후손 정찬휘가 제작한 포은집 속록에 들어갔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단심가 저자에 대한 의심은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일찍이 국문학계에서도 제기됐다"며 위작 여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견해를 드러냈습니다.
즉 현대에 정몽주를 충(忠)의 표상으로 인식하는 두 가지 이야기인 선죽교 사망설과 '단심가'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창작의 산물일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는 "정몽주는 조선 개국 후 부정적으로 평가됐으나, 태종 집권 이후 권근이 정몽주의 재평가를 주장했다"며 "이어 세종대에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정몽주가 우리나라 사례로 들어가면서 점차 절의의 인물로 부각됐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16세기 이후 정몽주의 행적을 숭상하는 다양한 책이 간행되면서 정몽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신화화 속도가 빨라졌고, 20세기 들어서도 활자본 한글소설 '선죽교'가 세 종이나 나오면서 정몽주는 위인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교수는 1979년 출간된 박종화 소설 '청산의 한줌흙들: 선죽교의 벽혈(碧血)'로 대중에게 정몽주가 다시 한번 각인됐고, TV 드라마 등을 통해 정몽주가 지닌 충신 이미지가 확산했다고 덧붙였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김인호 광운대 교수가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내는 학술지 '역사와현실'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정몽주의 신화화와 역사소비'에서 정몽주가 후대에 충절의 상징으로 신화화됐으며 그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는 허구로 판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려 후기에 조선 건국 세력과 대립하다 목숨을 잃은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는 충절과 의리를 지킨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그는 주자학 보급에 기여한 삼은(三隱) 중 한 명으로, 빈민 구제와 교육 진흥을 도모했습니다. 하지만 1392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됐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는 "정몽주가 죽은 장소는 자신의 집 근처 태전동으로 추정된다"며 "16세기 후반에 최립이 지은 시에 선죽교가 정몽주 사망 장소라고 처음 등장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교수는 선죽교가 정몽주 살해 장소로 변모한 정확한 이유는 알기 어렵지만, '착한 대나무 다리'라는 선죽교 의미와 조선시대에 유행한 중국 고사 중 죽은 군주를 위해 다리 아래에 숨어 암살을 시도한 자객 예양(豫讓) 이야기가 결합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선죽교 설화는 중국 고사를 누군가가 결부함으로써 더욱 극적인 이야기가 됐다"며 "조선 후기 선죽교는 신성한 곳으로 국가의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고 덧붙였습니다.
김 교수는 정몽주가 지었다는 시로 유명한 '단심가'(丹心歌)도 실제 그의 저작인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단심가'가 문헌 기록에서 처음 확인되는 사례가 1617년 간행된 '해동악부'라고 소개하면서 1439년 편찬한 정몽주 문집 '포은집' 초판에는 이 시가 수록되지 않았고 1719년 정몽주 후손 정찬휘가 제작한 포은집 속록에 들어갔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단심가 저자에 대한 의심은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일찍이 국문학계에서도 제기됐다"며 위작 여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견해를 드러냈습니다.
즉 현대에 정몽주를 충(忠)의 표상으로 인식하는 두 가지 이야기인 선죽교 사망설과 '단심가'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창작의 산물일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는 "정몽주는 조선 개국 후 부정적으로 평가됐으나, 태종 집권 이후 권근이 정몽주의 재평가를 주장했다"며 "이어 세종대에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정몽주가 우리나라 사례로 들어가면서 점차 절의의 인물로 부각됐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16세기 이후 정몽주의 행적을 숭상하는 다양한 책이 간행되면서 정몽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신화화 속도가 빨라졌고, 20세기 들어서도 활자본 한글소설 '선죽교'가 세 종이나 나오면서 정몽주는 위인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교수는 1979년 출간된 박종화 소설 '청산의 한줌흙들: 선죽교의 벽혈(碧血)'로 대중에게 정몽주가 다시 한번 각인됐고, TV 드라마 등을 통해 정몽주가 지닌 충신 이미지가 확산했다고 덧붙였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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