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민아는 변호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다. 그냥 딸이다. 내 피 중의 피요, 살 중의 살인 내 피붙이.”
강인숙 영인문학관장(83·건국대 명예교수)은 혹독하게 추웠던 4년 전 겨울, 그렇게 사랑한 딸을 가슴에 묻었다. 딸은 보낸지 4년만에야 강 관장은 절절한 사녀곡(思女曲)을 쓸 수 있었다. ‘민아 이야기’(노아의방주)에서 그는 하나뿐인 딸이자, 엄마의 친구, 고해 신부였던 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는 더 미루고 싶지 않다. 내가 발목을 잡고 있으면 아이가 이승 근처에서 계속 맴돌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강 관장의 장녀인 걸 떠나 이민아 목사는 그 자체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검사로 일했다.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했고, 청소년 변호사로, 다시 목사로 변신했다. 생전 쓴 여러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두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 갑상선암과 실명의 위기까기 갔던 망막박리를 이겨냈음에도 결국 위암을 극복하지 목해 5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 딸의 마지막 투병기, 엄마는 딸만 생각하면 누선(淚腺)이 고장난 것처럼 울기만 했다. 지금도 그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믿음이 없는 나는 그 애를 생각할 때마다 절망에 휩싸인다”고 고백한다.
10여년 넘게 투병했고, 세 아이가 커가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딸이지만 그는 “민아는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만 하다가 간 희귀종 인간이다. 그애의 삶은 늘 버거운 것이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삶이어서 가난해도 풍요로웠으며, 힘들어도 보람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민아를 잃은 것은 남편에게도 엄청난 시련이었다. 딸은 논리적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남달랐다. 대학에서 부친의 강의를 다 들었기 때문에 다른 형제와 달리 수사학이나 기호학에 대한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누곤 했다. 부녀지간의 수다에 식구들이 잠을 잘 수 없어 불평을 하면, 아래층으로 피신해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그래서 아빠에게는 딸만 잃은 것만이 아니라 호흡이 가장 잘 맞던 말 친구까지 잃은 걸 의미했다. 강 관장은 “그가 얼마나 엄청난 상실감에 젖어 있는지 잘 아는 나는, 그이 앞에서는 민아 이야기를 되도록 꺼내지 않는다”고 썼다.
책에서 그는 민아와 민아의 막내 딸과 자신이 마지막으로 떠났던 도쿄타워로의 여행,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화사한 빨간 옷을 입고 일정을 소화했던 딸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21.5센티미터의 작은 발을 가졌던 말이 숨을 거둘 때 작은 발을 쥐고 있던 저자는 작은 발의 온기가 사라지는 것으로 딸의 죽음을 인식했다고 한다. 그는 “진실로 감사한 것은 민아가 그 아픔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신의 은총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이다”라면서 “삶을 마감하는 9개월이라는 마지막 세월도 우리 옆에서 앓다가 갔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라고 딸에게 못다한 말을 전한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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