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선의 기억을 따라 만난 사람들⑤] 박정욱 한복디자이너 겸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이수자
[MBN스타 유지혜 기자] “전 참 ‘한국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명창으로서도, 한복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지만, 무엇보다 ‘저 사람 참 한국적인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이상 만족스러운 말은 없을 거예요.”
박정욱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이수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90호 평산소놀음굿 예능이수자로, 소위 ‘명창’이라 불린다. 전국팔도 공연장을 돌며 공연을 펼치는 ‘명창’이지만, 그에게는 직업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한복디자이너’다. 국악인이면서도 한복을 만지는 한복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박정욱 씨는 “바쁘긴 하지만 보람된 삶”이라고 웃음을 지었다.
“국악공연뿐 간혹 전통문화 관련 특강도 나가고, 국제행사도 많이 있어요. 국악인이니 공연할 때마다 한복을 입고 다니는데, 그럴 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복과 전통문화에 대해 설명하면 효과적이에요. 저 한 명이 뜨면 간편해지죠.(웃음) 나름대로는 보람된 삶이에요. 그렇게 바빠도 혼수일이 한복집에 들어오면 거기에 집중을 해야 해요. 전 한복만 해주지 않고, 예단 들어가고 이런 것까지 정리해주거든요. 오지랖이라고, 주책없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도 있지만, 어떻게 해요, 혼례라는 게 사람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데요. 당연히 신경을 써야죠.”
박정욱 씨는 자신의 한복집에 오는 손님들의 혼례 절차에 대해 꽤나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약식으로 하는 한이 있어도 생략은 하지 말라”며 전통혼례의 각종 절차를 간편한 형식으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신랑, 신부에게 전수하고 간단한 혼례 교육도 해준다고. 그는 “한국문화를 체험시켜줄 수 있는 게 한복집 아니겠느냐”며 스스로 ‘수고로움’을 찾아 고객들을 만나는 이유를 들었다.
“소가족이라고, 많이 바쁘다고 의례를 생략하면 전통을 지킬 게 없어지잖아요. 의례 자체는 살아있어야죠. 그래서 함의 의미, 혼서지 쓰는 법 같은 걸 현대의 감에 맞게 신랑, 신부에 소개해주고 체험하게 만들어줘요. 할 일이 그만큼 많아지지만, 이게 또 보람이거든요. 이렇게 한 번 전통의례를 체험한 분들은 그 다음 아기 돌잔치 같은 집안 행사를 전통식으로 하려고 해요. 결국 정성 아닐까요. 정성을 들이면 이를 잊지 않고 그게 기억에 남아 다시 찾게 되거든요.”
박정욱 씨는 “웨딩 촬영을 할 때에는 신부에 속곳까지 다 챙겨준다. 그 한 번의 체험으로 신부들은 ‘한복이 이런 건줄 몰랐다’고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짧은 순간이라도 전통한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배려다. 그는 단순히 한복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가례’라는 단어처럼 집안마다의 의례 절차를 디자인해주는 게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혼례 때 한복을 제대로 입어본 신부들은 아이를 낳고 아기 돌잔치를 할 때에 자연스럽게 한복을 떠올려요. ‘한 번 해봤다’는 그 체험이 정말 효과가 좋아요. 그렇게 한복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면, 금혼식과 같은 전통 의례들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도 있겠죠. 전통 의례문화를 체험으로 살려내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이유에요. ‘가가례’라는 단어처럼 한국 전통 의례를 각 가정에 맞게, 요즘 상황에 맞게 디자인을 해준다면 충분히 전승 가능하다고 봐요.”
박정욱 씨는 “너무 어렵다고,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간단하게나마 해보면 전통 의례가 충분히 현대에 녹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체험’을 중요시하게 여겼다. 한복을 한 번 입으면 굉장히 한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박정욱 씨는 “제대로 된 한복을 입었을 때 민족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한국인 DNA’”라고 설명했다.
“언젠가는 유치원 아이들에 장구를 가르치는 수업을 본 적이 있어요. ‘얼씨구’와 같은 추임새를 한 번 가르쳐줬을 뿐인데 기가 막히게 추임새를 집어넣으며 가락을 즐기더라고요. 그걸 보며 ‘역시 한국적 DNA가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한복도 비슷해요. 제대로 된 한복을 신랑, 신부에 입혀보면 푸근함, 여유로움, 뭉클함 같은 걸 느낀다고 말해요. 그게 바로 ‘한국적 DNA’인 걸요. 그런 정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교육받지 못하면서 점점 잊어버리게 되는 거죠. ‘한국적 DNA’를 듬뿍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한국적 정서를 덮어놓고 살면 그게 뭐예요. 규칙, 법도 같은 거로 한국복식을 이해시키지 않고서도, 그저 입혀보고 체험해보는 것으로 충분히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어요.”
박정욱 씨는 최근 인사동 거리에서 유행하는 한복 대여 시스템에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며 “왜 우리는 제대로 된 한복이 아닌 희한한 한복을 사람들에 체험시키게 만드는 걸까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올바른 상식 없이 체험을 시키면 잘못 ‘계승’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는 “올바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양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을 보면 기모노에 대한 사랑이 어마어마하고, 한 벌에 1억 원을 호가하는 기모노도 있죠.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시장 가서 싼 거 사 입자’하는 인식이 심해요. 한복에 대한 전문가도 필요하지만, 전문적으로 ‘이해시켜줄’ 사람도 필요하죠. 아쉬운 건 문화 체험도 교육이고, 교육이 생활로 스며들어 일상이 되는 건데 한복이든 음식이든 전통에 대해 상업적 수단으로 여기고 ‘얕은’ 맛과 멋을 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죠. 얕은 맛과 멋으로는 오래 못 가요. 시간 좀 걸리고, 힘들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굳혀나간다면, 그게 바로 문화가 되는 거죠.”
박정욱 씨는 “한국의 정서적, 민족적인 문화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오래 가도록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한국복식도 규격에 벗어나지만 않으면 세계화를 시킬 수 있다고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명품은 유행을 탈 수 있지만, 역사와 전통은 유행을 탈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조금은 시간을 투자하고,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자국의 문화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지켜나가려는 분위기는 생겨야 한다고 봐요. 한복이든, 한옥이든 그 속의 정신적인 것이 바로 ‘한류’거든요. 최근에 제가 가족모임을 앞둔 손님에게 사람 수대로 한복 속바지를 만들어준 적이 있어요. 가족들이 왔을 때 그 속바지를 내줬더니 다들 정말 좋아하면서 흔쾌히 하룻밤을 자고 갔대요. 비록 아파트에 살아도, 이런 작은 것들로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한국문화이지요. 이런 식으로 전통문화가 현대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호감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복을 입고 국악을 하던 박정욱 씨는 어느 새 전통 의례의 ‘전도사’가 될 정도로 한국문화 알리기에 앞장서는 사람이 됐다. 명창이 한복디자이너를 하다니, 꽤나 독특한 이력이라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바느질을 하셨다”고 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적 꿈이 큰 한복집을 차려서 한복을 곱게 입으신 어머니를 그 가운데에 앉혀드리는 것이었다고. 우연치 않은 기회에 한복을 시작하게 되어서 지금은 한복집을 차릴 정도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제가 군대 가기 전 공연을 다닐 때는 어머니께서 원단을 사와서 직접 옷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걸 도우면서 한복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후 무대 의상을 만들기 위해 한복학원에서 1년 배우고 단원들의 옷을 제가 직접 디자인하곤 했죠. 이후에 87년에 하희라 씨가 ‘하늘아 하늘아’에서 혜경궁 홍씨로 나왔을 때 제가 한복을 디자인해줬죠. 이외에도 장사익 씨, 진미령 씨 등의 한복들을 제가 해주기도 했어요. 낮엔 국악 공연을 하고 밤엔 바느질방에서 살았죠. 한복이란 저와 ‘붙어사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박정욱 씨는 “소리에 재능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한복을 하지 않았을까”하며 웃음을 지었다. 명창으로 공연을 다닐 때 직접 디자인한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이를 유심히 본 전통복식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석주선 선생이 그를 불렀다고 한다. 박정욱 씨는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 정말 운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제가 직접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한복 법칙에는 벗어나지 않되, 편한 남자 한복 디자인을 내게 됐어요. 그렇게 졸지에 ‘디자이너’가 된 거죠. 그러다 1992년 한 음악회에서 저를 보신 석주선 선생님께서 ‘잘 챙겨 입었네’라고 하시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시고 ‘궁금하면 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따라갔죠. 선생님으로부터 복식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이 배웠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렇게 박정욱 씨는 한복을 디자인하는 한복디자이너가 됐다. 국악을 하고, 한복을 알리며 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는 박정욱 씨는 “‘한국적’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한국의 정서를 담는다는 의미의 ‘한국적’이라는 단어는 박정욱 씨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단어였다. 그는 앞으로도 쭉 ‘한국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 소망은 ‘가장 한국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거예요. ‘저 사람은 한국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옷도 잘 짓고, 소리도 잘 하고, 음식도 잘하고요. 한국적인 건 다 잘하고 싶죠. 물론 명창으로도, 한복디자이너로서도 잘 하고 싶지만, ‘저 사람 참 한국적이네’ 이런 말 들으면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
사진제공=종로문화재단
[MBN스타 유지혜 기자] “전 참 ‘한국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명창으로서도, 한복 만드는 사람으로서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싶지만, 무엇보다 ‘저 사람 참 한국적인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이상 만족스러운 말은 없을 거예요.”
박정욱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이수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제90호 평산소놀음굿 예능이수자로, 소위 ‘명창’이라 불린다. 전국팔도 공연장을 돌며 공연을 펼치는 ‘명창’이지만, 그에게는 직업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한복디자이너’다. 국악인이면서도 한복을 만지는 한복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박정욱 씨는 “바쁘긴 하지만 보람된 삶”이라고 웃음을 지었다.
“국악공연뿐 간혹 전통문화 관련 특강도 나가고, 국제행사도 많이 있어요. 국악인이니 공연할 때마다 한복을 입고 다니는데, 그럴 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한복과 전통문화에 대해 설명하면 효과적이에요. 저 한 명이 뜨면 간편해지죠.(웃음) 나름대로는 보람된 삶이에요. 그렇게 바빠도 혼수일이 한복집에 들어오면 거기에 집중을 해야 해요. 전 한복만 해주지 않고, 예단 들어가고 이런 것까지 정리해주거든요. 오지랖이라고, 주책없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도 있지만, 어떻게 해요, 혼례라는 게 사람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데요. 당연히 신경을 써야죠.”
박정욱 씨는 자신의 한복집에 오는 손님들의 혼례 절차에 대해 꽤나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약식으로 하는 한이 있어도 생략은 하지 말라”며 전통혼례의 각종 절차를 간편한 형식으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신랑, 신부에게 전수하고 간단한 혼례 교육도 해준다고. 그는 “한국문화를 체험시켜줄 수 있는 게 한복집 아니겠느냐”며 스스로 ‘수고로움’을 찾아 고객들을 만나는 이유를 들었다.
“소가족이라고, 많이 바쁘다고 의례를 생략하면 전통을 지킬 게 없어지잖아요. 의례 자체는 살아있어야죠. 그래서 함의 의미, 혼서지 쓰는 법 같은 걸 현대의 감에 맞게 신랑, 신부에 소개해주고 체험하게 만들어줘요. 할 일이 그만큼 많아지지만, 이게 또 보람이거든요. 이렇게 한 번 전통의례를 체험한 분들은 그 다음 아기 돌잔치 같은 집안 행사를 전통식으로 하려고 해요. 결국 정성 아닐까요. 정성을 들이면 이를 잊지 않고 그게 기억에 남아 다시 찾게 되거든요.”
박정욱 씨는 “웨딩 촬영을 할 때에는 신부에 속곳까지 다 챙겨준다. 그 한 번의 체험으로 신부들은 ‘한복이 이런 건줄 몰랐다’고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짧은 순간이라도 전통한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배려다. 그는 단순히 한복을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가례’라는 단어처럼 집안마다의 의례 절차를 디자인해주는 게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혼례 때 한복을 제대로 입어본 신부들은 아이를 낳고 아기 돌잔치를 할 때에 자연스럽게 한복을 떠올려요. ‘한 번 해봤다’는 그 체험이 정말 효과가 좋아요. 그렇게 한복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면, 금혼식과 같은 전통 의례들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도 있겠죠. 전통 의례문화를 체험으로 살려내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이유에요. ‘가가례’라는 단어처럼 한국 전통 의례를 각 가정에 맞게, 요즘 상황에 맞게 디자인을 해준다면 충분히 전승 가능하다고 봐요.”
박정욱 씨는 “너무 어렵다고,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간단하게나마 해보면 전통 의례가 충분히 현대에 녹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강조했다. 그는 ‘체험’을 중요시하게 여겼다. 한복을 한 번 입으면 굉장히 한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박정욱 씨는 “제대로 된 한복을 입었을 때 민족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한국인 DNA’”라고 설명했다.
“언젠가는 유치원 아이들에 장구를 가르치는 수업을 본 적이 있어요. ‘얼씨구’와 같은 추임새를 한 번 가르쳐줬을 뿐인데 기가 막히게 추임새를 집어넣으며 가락을 즐기더라고요. 그걸 보며 ‘역시 한국적 DNA가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한복도 비슷해요. 제대로 된 한복을 신랑, 신부에 입혀보면 푸근함, 여유로움, 뭉클함 같은 걸 느낀다고 말해요. 그게 바로 ‘한국적 DNA’인 걸요. 그런 정서를 체험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교육받지 못하면서 점점 잊어버리게 되는 거죠. ‘한국적 DNA’를 듬뿍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한국적 정서를 덮어놓고 살면 그게 뭐예요. 규칙, 법도 같은 거로 한국복식을 이해시키지 않고서도, 그저 입혀보고 체험해보는 것으로 충분히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어요.”
박정욱 씨는 최근 인사동 거리에서 유행하는 한복 대여 시스템에 속상한 마음을 드러내며 “왜 우리는 제대로 된 한복이 아닌 희한한 한복을 사람들에 체험시키게 만드는 걸까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올바른 상식 없이 체험을 시키면 잘못 ‘계승’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는 “올바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양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을 보면 기모노에 대한 사랑이 어마어마하고, 한 벌에 1억 원을 호가하는 기모노도 있죠.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시장 가서 싼 거 사 입자’하는 인식이 심해요. 한복에 대한 전문가도 필요하지만, 전문적으로 ‘이해시켜줄’ 사람도 필요하죠. 아쉬운 건 문화 체험도 교육이고, 교육이 생활로 스며들어 일상이 되는 건데 한복이든 음식이든 전통에 대해 상업적 수단으로 여기고 ‘얕은’ 맛과 멋을 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죠. 얕은 맛과 멋으로는 오래 못 가요. 시간 좀 걸리고, 힘들더라도 제대로 된 것을 굳혀나간다면, 그게 바로 문화가 되는 거죠.”
박정욱 씨는 “한국의 정서적, 민족적인 문화에 대해 더 깊게 생각하고 단단하게 만들어 오래 가도록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한국복식도 규격에 벗어나지만 않으면 세계화를 시킬 수 있다고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명품은 유행을 탈 수 있지만, 역사와 전통은 유행을 탈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조금은 시간을 투자하고,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자국의 문화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지켜나가려는 분위기는 생겨야 한다고 봐요. 한복이든, 한옥이든 그 속의 정신적인 것이 바로 ‘한류’거든요. 최근에 제가 가족모임을 앞둔 손님에게 사람 수대로 한복 속바지를 만들어준 적이 있어요. 가족들이 왔을 때 그 속바지를 내줬더니 다들 정말 좋아하면서 흔쾌히 하룻밤을 자고 갔대요. 비록 아파트에 살아도, 이런 작은 것들로 한국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한국문화이지요. 이런 식으로 전통문화가 현대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호감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복을 입고 국악을 하던 박정욱 씨는 어느 새 전통 의례의 ‘전도사’가 될 정도로 한국문화 알리기에 앞장서는 사람이 됐다. 명창이 한복디자이너를 하다니, 꽤나 독특한 이력이라 물었더니 “어머니께서 바느질을 하셨다”고 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적 꿈이 큰 한복집을 차려서 한복을 곱게 입으신 어머니를 그 가운데에 앉혀드리는 것이었다고. 우연치 않은 기회에 한복을 시작하게 되어서 지금은 한복집을 차릴 정도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제가 군대 가기 전 공연을 다닐 때는 어머니께서 원단을 사와서 직접 옷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걸 도우면서 한복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이후 무대 의상을 만들기 위해 한복학원에서 1년 배우고 단원들의 옷을 제가 직접 디자인하곤 했죠. 이후에 87년에 하희라 씨가 ‘하늘아 하늘아’에서 혜경궁 홍씨로 나왔을 때 제가 한복을 디자인해줬죠. 이외에도 장사익 씨, 진미령 씨 등의 한복들을 제가 해주기도 했어요. 낮엔 국악 공연을 하고 밤엔 바느질방에서 살았죠. 한복이란 저와 ‘붙어사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박정욱 씨는 “소리에 재능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한복을 하지 않았을까”하며 웃음을 지었다. 명창으로 공연을 다닐 때 직접 디자인한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이를 유심히 본 전통복식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석주선 선생이 그를 불렀다고 한다. 박정욱 씨는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 정말 운이 좋았다”고 회상했다.
“제가 직접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한복 법칙에는 벗어나지 않되, 편한 남자 한복 디자인을 내게 됐어요. 그렇게 졸지에 ‘디자이너’가 된 거죠. 그러다 1992년 한 음악회에서 저를 보신 석주선 선생님께서 ‘잘 챙겨 입었네’라고 하시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시고 ‘궁금하면 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따라갔죠. 선생님으로부터 복식사에 대해 엄청나게 많이 배웠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렇게 박정욱 씨는 한복을 디자인하는 한복디자이너가 됐다. 국악을 하고, 한복을 알리며 하루를 바쁘게 살고 있는 박정욱 씨는 “‘한국적’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한국의 정서를 담는다는 의미의 ‘한국적’이라는 단어는 박정욱 씨를 나타내는 또 하나의 단어였다. 그는 앞으로도 쭉 ‘한국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제 소망은 ‘가장 한국적인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거예요. ‘저 사람은 한국 사람이야’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옷도 잘 짓고, 소리도 잘 하고, 음식도 잘하고요. 한국적인 건 다 잘하고 싶죠. 물론 명창으로도, 한복디자이너로서도 잘 하고 싶지만, ‘저 사람 참 한국적이네’ 이런 말 들으면 그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손의 기억, 침선의 기록’은 (재)종로문화재단과 함께 무지개다리지원사업 문화지구사랑방 문.지.방.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종로문화재단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함께 우리 사회의 문화다양성을 발굴하고, 공유하는 무지개다리사업 문화지구사랑방 문.지.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
사진제공=종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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