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
배우 박해일(39)을 수식하는 말은 많지만 그의 야누스적 이미지를 표현할 때 이보다 더 정확한 말도 없을 것이다.
그는 한 여자만 사랑하는 순정남(‘국화꽃 향기’의 서인하)도, 여교생(敎生)에게 변태행각을 일삼는 인간말쫑(‘연애의 목적’의 유림)도 모두 잘 어울렸다.
‘살인의 추억’ ‘괴물’ ‘이끼’ ‘최종병기 활’ ‘은교’ ‘제보자’ 등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연기 스펙트럼에 한계란 없음을 심감케 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 경계선에 선 인물이든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한국 근현대사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곁을 지킨 독립운동가다. 일본군 장교라는 위장 신분으로 덕혜옹주(손예진)를 호위하는 김장한은 친일파 한택수(윤제문)의 감시망을 피해 황녀의 고국행을 돕는다. 그 임무가 좌절되고 십수 년이 흐른 뒤에는 백발의 신문기자 신분으로 실종된 황녀를 찾는다.
‘덕혜옹주’ 개봉일(3일)을 이틀 앞둔 지난 1일, 서울 소격동 한 찻집에서 만난 박해일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라는, 그 시대적 공기를 최대한 느끼면서 연기에 임했다”며 운을 뗐다. “아무래도 현재가 아닌 그 시대 분위기를 계속 호흡해야 한다는 게 큰 어려움이었어요. 결코 가볍게 다가올 수 없는 시대였으니까요. 장한의 내면을 오롯이 표현하기 위해 그 모든 총체적인 느낌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죠.”
기록에 따르면 김장한은 덕혜옹주의 실제 정혼자였다. 하지만 영화화된 그는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일조한 신문기자 김을한과 혼합돼 있다. 김을한은 김장한의 실제 친형이었다. “실존했던 두 형제를 묶은 건 사실이지만 사료에서 가져간 건 많지 않아요. ‘제보자’에서 PD라는 언론인을 한 번 연기한 게 도움이 되더군요.”
박해일은 “허진호 감독이 왜 이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내려 한 건지 한동안 궁금했다”고 털어놨다.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추었던 인물이 무수히 많잖아요. 감독님 마음 한 켠에 그런 분들의 한을 달래주고 싶다는 의도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가 허 감독을 얘기할 땐 연출자에 대한 은근한 존경심이 전해졌다. “덕혜와 장한의 정서적 관계를 세공하고 반죽함에 있어 배우들에겐 최소한의 개입만 하셨어요. ‘장한은 이래야 된다’라는 테두리 같은 건 없었죠. 그냥 카메라 앞에 배우들을 풀어놓으셨어요.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을 보니 ‘영화란 감독의 예술일 수밖에 없구나’ 싶더군요.”
덕혜옹주를 열연한 손예진에 대해선 “프로 중의 프로”라고 그는 치켜세웠다. “같이 연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며 “동료의식이 매우 높은 배우였다”고 칭찬했다. “아픈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다보니 현장 분위기도 무거울 수밖에요. 그럼에도 굉장히 밝은 모습 보여주려 노력하더군요. 왜 예진씨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지 알 것 같았어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영화계에 입문한 지 16년째. 2016년의 박해일은 배우로서 지난 세월을 어떻게 여길까.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나이 먹는 걸 신경 쓰며 살아본 적 없어 사실 잘 모르겠어요. 돌아보니 꽤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네요. 저마다 책장에 꽂힌 책들처럼 느껴져요. 이 모든 책들을 자양분 삼아 더 신선한 모습 보여드려야죠.”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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