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우성(42)은 2013년 영화 제작사를 한 곳 차렸다. 정우성의 ‘우(Woo)’ 이니셜 ‘W’를 따 ‘더블유펙토리’라 이름 지은 회사였다. 감독 준비 얘기는 있었지만, 제작자 데뷔 소식은 다소 뜬금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보가 이윤정 신인감독의 장편 데뷔를 도우려던 것임이 알려지자 일약 화제가 됐다. 물론 개인적인 사심이 아니었다. 그는 기성 제작자들이 후배 영화인의 독특한 시나리오를 불편히 여기고, 그 개성을 없애려는 게 영 마뜩잖았다. “멜로에 대한 새로운 풀이와 영화에 대한 꿈이 보였달라까요. 이 감독 원안을 잘 살려줄 제작사를 함께 찾다가, 결국 제가 출연도 제작도 해보겠다고 나선거에요.” 7일 개봉하는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의 탄생 배경이다.
4일 서울 팔판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우성은 뒤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항상 후배 영화인들의 어려운 처지를 살피는 따뜻한 선배였다. 그는 “상업영화의 틀 안에 모든 작품이 메이져 취급을 받으니, 영화인을 꿈꾸는 후배들이 발 딛기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며 아쉬워했다. 후배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이너에서 메이져로 오를 사다리가 없어졌다는 우려였다. “예산 등 규모 면에서 작은 영화가 활발히 제작될 환경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요. 후배 영화인 상당수가 메이져 판에서 좌충우돌하다가 이내 이탈해버리죠. 그렇게 조성되는 경쟁은 온당치 않아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신인감독들이 큰 예산으로 감당키 힘든 모험을 마이너에서 마음껏 펼치게 돕는 것. 그게 저같은 선배들의 몫이 아닐까요.”
그가 ‘더블유펙토리’를 차려 이윤정 감독과 ‘나를 잊지 말아요’를 제작·연출하고 주연까지 겸한 데에는 이같은 맥락이 깔려있다. 그런 정우성은 “이 감독이 신인이다보니 자신이 만든 텍스트를 영상으로 실현할 때, 그 간격에서 오는 괴리감이 좀 컸을 것”이라며 “그 격차를 최소화할 수 있게 균형 잡아주는 역할에 집중했다”고 털어놨다. “어떤 건 포기시키고, 어떤 건 잡아주려고 노력했죠. 물론 감독이 애초에 원했던 걸 100% 지켜줄 순 없었어요. 엄연히 상업영화니까요. 다만, 원안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고,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영상 언어가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편안함은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영화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10년 간 기억을 송두리째 잃은 ‘석원’(정우성)과 그 앞에 나타난 ‘진영’(김하늘)의 가슴 시린 이야기를 다룬다. 기억을 잃은 한 남자의 우수에 찬, 공허하면서 텅 빈 듯한 눈빛은 ‘멜로 깡패’ 정우성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터. 그는 “기억을 잃어버린 석원의 무심한 모습을 연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도리어 “석원과의 아픈 기억을 가슴에 묻고 사는 진영이 더욱 어려웠을 것”이라며 김하늘을 치켜세웠다. “석원은 나약한 현실도피자에요. ‘부분기억상실’이란 병명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방어기제로 인해 상처를 외면하죠. 반면 진영은 그대로 직시합니다. 처연하고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강인한 여자죠. 하늘씨가 많이 고생했어요.”
그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와 이번 작품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둘 다 기억을 소재로 하지만 변주 방식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전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마저 잊어가는 모습에 남자가 아픔을 느끼는 얘기죠. 이번 영화는 상처를 바라보는 두 남녀의 서로 다른 처세술을 그려요. 아주 현실적인 사랑 이야기죠. 관객들이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을 많이 얻어가시길 바라요.”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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