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카드를 묶어. 그리고 돈을 인출해.”
“이러면 돈이 들어오나요?” (기자)
“기다려 봐. 곧 입금될 거야.”
잠시 후, 41.39달러(한화 약 54,000원)가 실제로 들어왔습니다. 곧이어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나는 이번에 500달러를 충전할 거야. 오빠도 더 주문할래?”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부터 [국외발신]이라는 제목으로 한 통의 문자가 날라왔습니다.
“7월 29일에 공항에서 나를 환영해 줄래?”
자신을 마중 나오라며 LINE(라인) 아이디를 추가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에 계신 이모가 떠오르긴 했지만 당장 입국 계획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최근 라인에서 친구 추가해달라는 정체불명의 문자를 이따금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확인차 친구 추가를 해봤습니다.
접촉을 시도하자 곧 답장이 왔습니다.
“저는 목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어 가명으로 기자를 소개하니 곧바로 “오빠”라며 친밀감을 표시했습니다. 2분 만에 '동생'이 생긴 저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오빠야, 너 올해 몇 살이야”
34살임에도 아직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는 기자의 말에 '목란' 씨는 부끄러워하지 말라며 직업을 물었고, 기자라는 말에 대단한 일을 한다며 추켜세웠습니다.
TEMU(테무·중국의 쿠팡)에서 일하는 베트남 화장품 사업가로 자신을 소개한 목란은 곧 사업 확장을 위해 한국에 올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어김없이 “오빠, 안녕하세요”라며 말을 걸어오더니 이후 날씨, 일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꾸준히 연락을 해왔습니다. 한국을 방문해 서울에서 집을 사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수영장에서 찍은 '셀카'라며 사진을 보냈고, 마치 '썸'을 타는 관계처럼 점점 친밀감을 높여갔습니다.
“한국에 가면 나랑 같이 있자”, “나중에 같이 서울에 집을 마련하자” 등의 메시지도 스스럼없이 보냈습니다.
또, 테무에서 이번 달 6,000달러(한화 약 800만 원)를 벌었다며 재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연락 일주일째,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테무 작업을 도와달라며 자신이 공유한 링크에 들어가 캡처 화면을 보여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추천코드를 입력하고 로그인하자 흔히 알려진 테무 홈페이지와는 사뭇 다른 화면이 나왔습니다.
자신의 계정으로 다시 로그인해 주문서를 작성하고 할당량을 채워달라는 목란은, 회원가입 당시 입력한 추천코드로 자신과 본 기자의 계정이 연결돼 있으니 주문량에 따라 수수료가 쌓일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중간중간 잔액이 부족하다는 안내문이 떴고, 역시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이체 증명서를 '온라인 상담원'에게 보내자 금액이 충전됐습니다.
이와 유사한 절차가 세 차례, 약 30분간 반복됐습니다.
그 후 목란의 요구대로 로그아웃한 뒤 기자의 계정으로 재접속해보니 화면에 41.39달러가 찍혀 있었습니다. 앞서 약속한 '중개 수수료 수입'이었습니다. 인출용으로 은행카드 연결을 유도했고, 마침 해지할 계좌가 있어 은행 정보를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10분 뒤, 정말로 41.39달러(한화 54,322원)가 계좌로 입금됐습니다.
일단 입금으로 안심시킨 뒤, 더 많은 돈을 벌자며 추가로 투자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금전 요구에 돈이 없다, 못 믿겠다고 하자 목란의 태도는 회유에서 원망으로 돌변했습니다.
“내가 너한테 뭘 속였는지 설명해달라”라는 메시지에 이어 “너는 남자로서 조금의 책임감도 없다”는 말로 대화는 종료됐습니다.
어눌한 번역체와 허접한 가짜 사이트, 이런 범죄에 노출된 사람들은 정말 단지 ‘외롭다'는 이유로 피해를 보는 것일까.
피해자의 사연을 직접 들여다봤습니다.
20대 직장인 A 씨는 지난 3월 모르는 번호로 라인 아이디가 적힌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단순 호기심으로 연락을 취했고, 안부를 묻는 등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 상대방으로부터 연인을 찾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개월이 지나서야 본론을 꺼낸 상대, 역시 특정 해외직구 사이트를 빙자한 사기 사이트에 접속해 돈을 송금하면 사이트 내 자산이 쌓일 거라며 투자를 권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기자의 경우처럼 주문만 완료하면 출금할 수 있었지만, 이후 상대는 세금 등의 명목으로 추가 금액을 요구했고, 피해자는 결과적으로 약 2,000만 원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당한 '로맨스스캠'에서 로맨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상대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애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연애를 시작했다"며 상대방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솔직히 별다른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연락을 이어간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A 씨는 “처음에는 틱톡(TikTok)처럼 추천인을 입력하면 현금을 주는 시스템으로 생각했다”며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이처럼 피해를 입고도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고해도 돈을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A 씨와 같은 피해자 모임에 있는 B 씨, 역시 1억 원을 잃고도 신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B 씨는 “지난해 12월부터 피해자들이 (신고를) 이미 다 했다. 그런데 (경찰에서) 못 잡는다며 수사가 종결됐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희망이 꺾인 피해자들은 2차 피해에 노출될 우려도 있습니다. 스캠으로 잃은 돈을 다시 스캠을 통해 복구할 수 있다는 유혹 때문입니다.
B 씨는 피해자들이 사기업체를 통해 부수입을 얻는 일이 빈번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저렇게 피해를 당하신 분들한테 (사기업체가) 나중에 연락을 취해 송금책 알바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1,000만 원 이체하면 10만 원 준다고.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려고 (피해자들이) 사기업체들의 자금세탁소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사기를 치는지, 어떤 식으로 (돈을) 찾아야 하는지를 서로 알려주며, 피해자 방이 일종의 정보 공유방으로 변질되기도 한다”고 폭로했습니다. B 씨도 이런 방법으로 수익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돈이 늘어나는 걸 보니 부수입으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과거에는 상대방의 호감을 얻은 후 단순한 금전을 요구하는 ‘로맨스스캠‘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돼지 도살 스캠(pig butchering)’이라는 신종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돼지를 살찌게 한 뒤 많은 고기를 얻듯, 신뢰를 쌓고 투자를 유도해 많은 돈을 가로채는 사기 수법을 말합니다. 기자의 사례처럼 가짜 사이트에서 충전을 요구하거나 가짜 암호화폐에 입금을 유도하는 코인 투자형을 포함해 다양한 유형이 존재합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국내에선 정확한 '로맨스스캠' 피해 규모가 집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련 피해 신고가 잇따르면서 경찰은 올해부터 로맨스스캠을 금융 범죄로 분류해, 지난 2월 본격적인 피해 규모를 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집계 결과, 상반기에만 628건, 약 454억 원의 피해액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국정원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 동안 집계한 신고 피해액 138억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입니다. 게다가 로맨스스캠 범행 특성상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경향이 있어 실제 피해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경찰 당국은 보고 있습니다.
로맨스스캠도 보이스피싱처럼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있고, 주된 범행지가 국외에 있다는 등의 이유로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여러 경로를 통한 자금 세탁 방식 때문에 피해 복구가 쉽지 않다는 게 수사기관의 설명입니다.
보이스피싱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근거해 은행이 범죄에 이용된 계좌를 즉시 지급 정지할 수 있는 반면, 로맨스스캠 범죄는 계좌 지급정지가 불가능합니다. ‘로맨스’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개인의 부주의로 애정을 쌓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로맨스스캠도 보이스피싱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주는 만큼 관련 법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고려대학교 이상진 교수 등의 논문은 “이미 로맨스스캠 피해금이 입금된 계좌라고 신고가 됐음에도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아 추가 피해가 다수 발생한 것을 직접 확인했다”며 “범행에 이용된 대포통장에 대한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에는 로맨스스캠에 대한 적극적인 신고 채널이 없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피해 예방과 피해확산 방지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위 사례와 같이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않는 점과 2차 피해를 당할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 역시 적극적인 신고 채널의 부재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경찰대학 경찰학연구편집위원회가 2023년 발행한 학술 저널에서도 같은 문제 제기가 나왔습니다. 네이버 빅데이터를 분석한 경찰대 서준배 교수팀은 보이스피싱의 경우 ‘처벌’, ‘피해자’, ‘경찰서’ 등이 최다수 연속적으로 언급됐지만, 로맨스스캠은 사전적 의미를 묻는 말들이 많았으며 처벌 등 신고 관련 언급이 보이스피싱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빈도로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로맨스스캠 범죄 자체가 보이스피싱에 비해 덜 알려져 있고, 대책 또한 그만큼 미흡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연구진은 "장기적으로는 로맨스스캠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신고가 이루어지도록 신고 플랫폼 마련과 함께 관련 교육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 인기척은 MBN '인'턴 '기'자들이 '척'하니 알려드리는 체험형 기사입니다.
[김경태 디지털뉴스부 인턴기자 dragonmoon2021@naver.com]
“이러면 돈이 들어오나요?” (기자)
“기다려 봐. 곧 입금될 거야.”
잠시 후, 41.39달러(한화 약 54,000원)가 실제로 들어왔습니다. 곧이어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나는 이번에 500달러를 충전할 거야. 오빠도 더 주문할래?”
라인 아이디를 추가하자 시작된 대화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부터 [국외발신]이라는 제목으로 한 통의 문자가 날라왔습니다.
“7월 29일에 공항에서 나를 환영해 줄래?”
자신을 마중 나오라며 LINE(라인) 아이디를 추가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에 계신 이모가 떠오르긴 했지만 당장 입국 계획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최근 라인에서 친구 추가해달라는 정체불명의 문자를 이따금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확인차 친구 추가를 해봤습니다.
접촉을 시도하자 곧 답장이 왔습니다.
“저는 목란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어 가명으로 기자를 소개하니 곧바로 “오빠”라며 친밀감을 표시했습니다. 2분 만에 '동생'이 생긴 저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로맨스스캠범은 흔히 상대방의 외로움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캠범의 먹이가 되기 위해 외로운 모태솔로가 된 기자 / 사진 = 김경태 인턴기자
“오빠야, 너 올해 몇 살이야”
34살임에도 아직 연애 한 번 못 해봤다는 기자의 말에 '목란' 씨는 부끄러워하지 말라며 직업을 물었고, 기자라는 말에 대단한 일을 한다며 추켜세웠습니다.
TEMU(테무·중국의 쿠팡)에서 일하는 베트남 화장품 사업가로 자신을 소개한 목란은 곧 사업 확장을 위해 한국에 올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날씨 어때”에서 “같이 살자”까지
다음 날 어김없이 “오빠, 안녕하세요”라며 말을 걸어오더니 이후 날씨, 일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꾸준히 연락을 해왔습니다. 한국을 방문해 서울에서 집을 사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수영장에서 찍은 '셀카'라며 사진을 보냈고, 마치 '썸'을 타는 관계처럼 점점 친밀감을 높여갔습니다.
수영장에서 찍은 셀카를 보낸 목란(왼쪽). 신기하게도 매번 보내준 사진 속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차가 없다고 말했지만 어떻게든 안전운전 하라는 독불장군 그녀(오른쪽), 참 스윗하다. / 사진 = 김경태 인턴기자
“한국에 가면 나랑 같이 있자”, “나중에 같이 서울에 집을 마련하자” 등의 메시지도 스스럼없이 보냈습니다.
또, 테무에서 이번 달 6,000달러(한화 약 800만 원)를 벌었다며 재력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드러낸 속마음…“테무 작업 좀 도와줘”
연락 일주일째,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처음 링크가 왔을 때 해킹당할까 겁이 났다. 고민 끝에 피시방에서 접속을 시도했다. / 사진 = 김경태 인턴기자
테무 작업을 도와달라며 자신이 공유한 링크에 들어가 캡처 화면을 보여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지시에 따라 추천코드를 입력하고 로그인하자 흔히 알려진 테무 홈페이지와는 사뭇 다른 화면이 나왔습니다.
링크에 접속해 처음 마주한 로그인 화면(왼쪽). 이곳에서 목란의 지시대로 회원가입을 마치자 김정은이 96달러를 얻어 축하받고 있다(오른쪽). 북쪽 동무의 은밀한 자본주의 사생활인가. 이후 목란은 사진처럼 빨간 화살표를 활용해 기자에게 친절히 다음 작업을 안내했다. / 사진 = 김경태 인턴기자
자신의 계정으로 다시 로그인해 주문서를 작성하고 할당량을 채워달라는 목란은, 회원가입 당시 입력한 추천코드로 자신과 본 기자의 계정이 연결돼 있으니 주문량에 따라 수수료가 쌓일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중간중간 잔액이 부족하다는 안내문이 떴고, 역시 그녀의 지시에 따라 이체 증명서를 '온라인 상담원'에게 보내자 금액이 충전됐습니다.
주문서를 작성하다 보면 금액이 부족하다는 알림과 마주한다. 그러면 목란이 충전하겠다며 이체 증명서를 기자에게 보낸다(왼쪽). 기자는 이 증명서를 사이트의 온라인 상담원에게 전송, 상담원은 확인했다며 목란의 계정에 돈을 채워준다(오른쪽). 기자는 다시 주문서 작업을 이어간다. 여기서 금액은 가상의 돈이다. / 사진 = 김경태 인턴기자
이와 유사한 절차가 세 차례, 약 30분간 반복됐습니다.
“같이 돈 벌자”…결국 돈 보내라는 거였다
그 후 목란의 요구대로 로그아웃한 뒤 기자의 계정으로 재접속해보니 화면에 41.39달러가 찍혀 있었습니다. 앞서 약속한 '중개 수수료 수입'이었습니다. 인출용으로 은행카드 연결을 유도했고, 마침 해지할 계좌가 있어 은행 정보를 입력했습니다.
그리고 10분 뒤, 정말로 41.39달러(한화 54,322원)가 계좌로 입금됐습니다.
실명과 연락처, 은행명과 계좌번호를 요구하는 화면(왼쪽). 고심 끝에 실제 정보를 작성했고, 진짜로 돈이 들어와 놀란 기자(오른쪽). 스캠범은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소액을 보내주면서 피해자로부터 신뢰를 얻는다. 계속된 호의에 피해자는 점점 경계를 풀다 결국 뒤통수를 맞는 것. 기자는 즉시 계좌를 삭제했다. / 사진 = 김경태 인턴기자
일단 입금으로 안심시킨 뒤, 더 많은 돈을 벌자며 추가로 투자해야 한다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금전 요구에 돈이 없다, 못 믿겠다고 하자 목란의 태도는 회유에서 원망으로 돌변했습니다.
같이 충전하자고 권유하는 목란에게 돈이 없다고 대답한 기자. 그녀는 저축하라며 기자를 꾸짖었다. / 사진 =김경태 인턴기자
“내가 너한테 뭘 속였는지 설명해달라”라는 메시지에 이어 “너는 남자로서 조금의 책임감도 없다”는 말로 대화는 종료됐습니다.
‘로맨스’ 없는 로맨스스캠…그들은 외로워서 당한 게 아니다
어눌한 번역체와 허접한 가짜 사이트, 이런 범죄에 노출된 사람들은 정말 단지 ‘외롭다'는 이유로 피해를 보는 것일까.
피해자의 사연을 직접 들여다봤습니다.
20대 직장인 A 씨는 지난 3월 모르는 번호로 라인 아이디가 적힌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단순 호기심으로 연락을 취했고, 안부를 묻는 등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 상대방으로부터 연인을 찾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개월이 지나서야 본론을 꺼낸 상대, 역시 특정 해외직구 사이트를 빙자한 사기 사이트에 접속해 돈을 송금하면 사이트 내 자산이 쌓일 거라며 투자를 권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기자의 경우처럼 주문만 완료하면 출금할 수 있었지만, 이후 상대는 세금 등의 명목으로 추가 금액을 요구했고, 피해자는 결과적으로 약 2,000만 원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당한 '로맨스스캠'에서 로맨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상대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애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연애를 시작했다"며 상대방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솔직히 별다른 감정을 느끼진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연락을 이어간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A 씨는 “처음에는 틱톡(TikTok)처럼 추천인을 입력하면 현금을 주는 시스템으로 생각했다”며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신고해도 소용없어”…피해 복구하려 다시 스캠에 빠지는 피해자들
이처럼 피해를 입고도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고해도 돈을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A 씨와 같은 피해자 모임에 있는 B 씨, 역시 1억 원을 잃고도 신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B 씨는 “지난해 12월부터 피해자들이 (신고를) 이미 다 했다. 그런데 (경찰에서) 못 잡는다며 수사가 종결됐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희망이 꺾인 피해자들은 2차 피해에 노출될 우려도 있습니다. 스캠으로 잃은 돈을 다시 스캠을 통해 복구할 수 있다는 유혹 때문입니다.
B 씨는 피해자들이 사기업체를 통해 부수입을 얻는 일이 빈번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저렇게 피해를 당하신 분들한테 (사기업체가) 나중에 연락을 취해 송금책 알바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1,000만 원 이체하면 10만 원 준다고. 이런 식으로 자기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려고 (피해자들이) 사기업체들의 자금세탁소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사기를 치는지, 어떤 식으로 (돈을) 찾아야 하는지를 서로 알려주며, 피해자 방이 일종의 정보 공유방으로 변질되기도 한다”고 폭로했습니다. B 씨도 이런 방법으로 수익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돈이 늘어나는 걸 보니 부수입으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 집계 결과, ‘5년’ 신고액 < ‘상반기 5개월’ 피해액
…전문가들 “관련 법 개선·신고 플랫폼 마련 필요”
…전문가들 “관련 법 개선·신고 플랫폼 마련 필요”
과거에는 상대방의 호감을 얻은 후 단순한 금전을 요구하는 ‘로맨스스캠‘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돼지 도살 스캠(pig butchering)’이라는 신종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돼지를 살찌게 한 뒤 많은 고기를 얻듯, 신뢰를 쌓고 투자를 유도해 많은 돈을 가로채는 사기 수법을 말합니다. 기자의 사례처럼 가짜 사이트에서 충전을 요구하거나 가짜 암호화폐에 입금을 유도하는 코인 투자형을 포함해 다양한 유형이 존재합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국내에선 정확한 '로맨스스캠' 피해 규모가 집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관련 피해 신고가 잇따르면서 경찰은 올해부터 로맨스스캠을 금융 범죄로 분류해, 지난 2월 본격적인 피해 규모를 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집계 결과, 상반기에만 628건, 약 454억 원의 피해액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국정원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 동안 집계한 신고 피해액 138억보다 3배 이상 많은 수치입니다. 게다가 로맨스스캠 범행 특성상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경향이 있어 실제 피해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경찰 당국은 보고 있습니다.
기자 주변인들로부터 받은 라인 스팸 문자. 인터넷에 검색해도 많은 이들이 받아 본 경험이 있다고 나온다. 대부분 투자 유도 로맨스스캠이니 궁금하더라도 연락하지 말자 / 사진 = 김경태 인턴기자
로맨스스캠도 보이스피싱처럼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있고, 주된 범행지가 국외에 있다는 등의 이유로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여러 경로를 통한 자금 세탁 방식 때문에 피해 복구가 쉽지 않다는 게 수사기관의 설명입니다.
보이스피싱은 통신사기피해환급법에 근거해 은행이 범죄에 이용된 계좌를 즉시 지급 정지할 수 있는 반면, 로맨스스캠 범죄는 계좌 지급정지가 불가능합니다. ‘로맨스’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개인의 부주의로 애정을 쌓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준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로맨스스캠도 보이스피싱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주는 만큼 관련 법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고려대학교 이상진 교수 등의 논문은 “이미 로맨스스캠 피해금이 입금된 계좌라고 신고가 됐음에도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아 추가 피해가 다수 발생한 것을 직접 확인했다”며 “범행에 이용된 대포통장에 대한 신속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상진 교수 연구팀이 제시한 개정안. 현재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처벌 대상에 로맨스스캠이 빠져 있는데 이는 로맨스스캠의 행위 태양을 재화나 용역의 제공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출처 = 박범진, 이상진. (2023). 로맨스 스캠 현황 및 대응 방안. 디지털포렌식연구, 17(1), 95-116.
또한 현재 우리나라에는 로맨스스캠에 대한 적극적인 신고 채널이 없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피해 예방과 피해확산 방지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위 사례와 같이 피해자들이 신고하지 않는 점과 2차 피해를 당할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 역시 적극적인 신고 채널의 부재 때문이라는 지적입니다.
경찰대학 경찰학연구편집위원회가 2023년 발행한 학술 저널에서도 같은 문제 제기가 나왔습니다. 네이버 빅데이터를 분석한 경찰대 서준배 교수팀은 보이스피싱의 경우 ‘처벌’, ‘피해자’, ‘경찰서’ 등이 최다수 연속적으로 언급됐지만, 로맨스스캠은 사전적 의미를 묻는 말들이 많았으며 처벌 등 신고 관련 언급이 보이스피싱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빈도로 나타났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로맨스스캠 범죄 자체가 보이스피싱에 비해 덜 알려져 있고, 대책 또한 그만큼 미흡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연구진은 "장기적으로는 로맨스스캠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신고가 이루어지도록 신고 플랫폼 마련과 함께 관련 교육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 인기척은 MBN '인'턴 '기'자들이 '척'하니 알려드리는 체험형 기사입니다.
[김경태 디지털뉴스부 인턴기자 dragonmoon20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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