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역사와 우리나라 역사 제9마당. → 이집트 자유장교단의 군사혁명.
세계역사가들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1798년에 이집트를 침공한 해부터 현대이집트 역사가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1798년에 이집트를 침공하고 1년 후인 1799년 8월에 이집트 고대사를 밝혀줄 획기적이 사건인 로제타석을 발견하는 일이 발생했다.
무려 20년 이상이 걸려서 프랑스의 어학에 두각을 가진 샹폴리옹은 그르노블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여러 어학 중 콥트어와 고대이집트 상형문자들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로제타석에 새겨진 상형문자의 음가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1869년에는 바다와 바다를 이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프랑스가 허가를 받아 개통하였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집트의 보호국인 영국과 종주국인 터키는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전쟁이 1918.11월에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이집트는 반영(反映)의식이 사회저변 으로 변지고 독립운동이 전지역과 전계층으로 확산되어 일어나 학생 선생 의사 변호사 법관 정부공무원 철도운송원들이 저마다 시위에 들어가게 되어 이집트 전국민은 하나가 되어 이집트인을 위한 이집트를 1919년 3월에 부르짖었다.
이집트 역사는 이것을 1919혁명 이라고 부른다.
결국 1922년 2월 28일에 영국은 이집트에 대한 보호권을 공식 철폐하고 이집트가 독립국가임 을 선언했다.
2차세계대전이 1939.9.1.~1945.5.7일에 독일항복과 1945.8.15일에 마지막 일본항복으로 끝나고 1947년에 영국과 미국은 국제연합을 통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구역으로 분리할 것을 결의하자 아랍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자 결국 1948년 초에 팔레스타인전쟁이 1차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아랍국가에 참전하였으나 모욕적인 패배만 했다. 결국 이스라엘이 국제연합이 유대인에게 할당했던 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종결되었다.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이집트 왕정은 불신의 대상이 되자 왕뿐만이 아니라 고위정치인과 군지휘관 등 지배체제 자체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 되었다.
결국 이집트는 현재의 지배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비밀단체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그중의 하나 군조직을 이용할 수 있는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유장교단 이었다.
자유장교단은 대체로 풍족하지 않은 서민층 출신들로 300명 정도의 소장장교들이 여기에 참여하여 1952년 7월 23일에 쿠데타를 감행하여 왕을 체포하고 주요기관을 장악하거나 접수 했다.
국민들 간에는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실망과 증오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쉽게 성공하여 이를 자유장교단의 군사혁명 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장교단의 군사혁명은 곧 혁명평의회를 구성하고 이집트 파루크왕을 퇴위시키고 국외로 추방했다.
1953년 6월에 왕정제를 폐지한 후 공화제를 제정해 나기브가 대통령 겸 수상이 되었다.
1954년 11월에는 무슬림형제단과 가까웠던 나기브가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혁명의 실질 주체자였던 가말압둘 나세르가 수상이 되어 실제적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겨우 정국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56년 6월에 나세르는 신헌법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 99.9%의 지지를 받고 6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서 2000년간 외국인 출신의 지배자에 의한 이집트통치가 종결되고 이집트인에 의한 이집트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영국이 부당하게 이집트의 몫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에즈운하를 되찾게 되면 이집트는 미국의 원조에 의지할 필요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댐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56년 10월 30일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은 병력을 주둔하고 시나이 반도를 차지해 버렸다. 이것이 2차 아랍 이스라엘 전쟁이다.
국제연함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삼국의 무력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정전을 요구하면서 수에즈 지대에 유엔군을 파견한다는 안을 채택하였다.
이와 같은 수에즈전쟁으로 아랍 이스라엘 전쟁은 국제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나세르는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정치 외교적인 승리를 거두어 수에즈운하를 이집트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이로써 이집트는 식민지 지배의 잔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이스라엘을 괴롭히자 이스라엘은 전면전을 추진하여 1967년 6월 5일 이집트군은 이스라엘 공습으로 궤멸당하고 시나이 반도와 수에즈운하를 포함한 전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은 점령해버렸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제공격 으로 6일전쟁이며 제3차 아랍 이스라엘 전쟁이다.
수에즈운하의 폐쇄는 이집트인들에게 치욕의 상징이었다. 이에 1973년 10월 6일에 이집트 공군과 포대가 수에즈 동안을 맹렬하게 공격함과 동시에 시리아가 골란고원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것을 제4차 아랍 이스라엘 전쟁 이라고 한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도와주어 미국의 첩보위성이 이집트군의 중앙부와 취약지구를 구별해서 이스라엘군에 낱낱이 통보해주어 수에즈운하 서안에다 교두보를 만들었으나 미국의 키신저의 정치적으로 휴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차 아랍 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겼던 이집트의 수에즈운하(서안)와 시리아도 모두 회수 받았다.
역사는 이집트의 군사혁명 이후 나세르 후로 사다트가 대통령이 되어 1978년 9월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미국의 설득으로 평화협정을 맺고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와 이스라엘 수상 베긴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이러한 평화협정은 도리어 팔레스타인 인들의 권리를 실제로 주지를 못했다. 이에 이집트는 아랍국가들에 의해 아랍연맹에서 추방당하고 카이로에 있던 아랍연맹 본부는 튀니지로 옮겨졌다.
사다트는 쏟아지는 국내외에서 비난에 대처하면서 점점 독선적이 되어 측근의 충고를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국사를 결정하여 1979년 6월에 의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하여 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1980년에는 조작된 국민투표에 의해 영구집권을 시도하였다.
한편 기득권층의 부패와 부유층의 사치 인풀레이션 중하층민들의 고통은 가중되자 파업 시위는 점점 일어나고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사다트의 탄압행위는 격렬하자 이에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사다트는 수에즈운하 승전기념일이었던 1981년 10월 6일에 군소령인 사격교관의 소총에 심장을 관통하여 시해되었다.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는 전쟁에 지고 이스라엘에게 땅을 빼앗겼으나 국민들은 그의 서거를 슬퍼하였으나 사다트는 이스라엘에게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되찾았으나 그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이집트는 아랍국가들과의 관계를 재개할 일과 엉망이 된 경제를 일으켜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5.16군사혁명은 다음과 같다.
역사와 혁명과 전쟁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으며 이미 지나갔다. 어느 누구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곧 태양을 뒤로 가게 만들 수 없다. 세월을 뒤로 가게 할 수 없다. 나이를 뒤로 돌릴 수 없다.
혁명 전쟁 등의 역사는 다만 그 당시의 배경과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가지고 연구하여 미래를 위해 나라를 위해 방책을 세우는 일만 남아있다. 방책을 세우는 자는 미래가 열릴 것이고 방책대신에 비겁하게 지저분하게 혁명이 아니라니 하는 자는 그 나라는 망하게 된다고 봅니다.
♠ 어느 나라 역사나 혁명은 구국 애족의 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
♠ 큰 뜻을 가진 자는 어떠한 사람도 혁명은 가능하다.
♠ 제국이 분열되고 망하는 것은 정치 경제 군사 등 제반 분야의 부패와 도덕의 추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 부패는 하루아침에 온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곪아 들어간 것이다.
♠ 역사는 스포츠와 같다. 즉 그때 경기에서 승패를 인정하여야 게임은 끝난다.
만일에 게임에 졌으면 깨끗하게 끝을 맺어야지 추잡하게 수년 수십년이 지닌 후에 그 게임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지저분하고 추잡한 짓이다.
◉ 박정희의 5.16군사혁명을 일으킨 당시의 배경과 결과.
1. 1960년 4.19학생의거인 곧 4.19혁명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일어났다.
2. 1960년에 일어난 3.15부정선거를 뒷마무리를 속시원히 처결하지 못하였다.
3. 구정권과 결탁되어 치부한 부정축재자의 재산몰수나 구정치인에 대한 처벌 등에 극히
미온적이었던 데 대한 4.19혁명세력의 불만이 노골적이었다.
4. 자유당의 권익과 정치적 요구와 사회적 이익추구가 데모의 형식을 통하여 속출하였다.
5. 데모만능주의가 팽배하여 학생데모가 무려 747회며 노총데모가 675회가 발생하였다.
6. 의원내각제인 형식만 가진 4대 대통령인 윤보선시대에 파벌싸움의 격화와 장면정권의
무능이다.
7. 196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74%이상의 압승을 거두었다. 구파의 김도연과 신파의 장면의
국무총리의 선출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합에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8. 구파는 민주당과 결별하고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여 극한투쟁을 벌여 장변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9. 혁신세력의 대두와 공산주의 위협의 증가가 일어났다.
10. 1960년 4.19혁명이후 7월 7.29. 5대 국회의원총선에 혁신계에서 148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비록 5명만 당선되었다.
11. 총선이후 1960년 8.14일에 김일성이 시기를 포착하여 남북연방제안을 내놓았다.
12. 1961.2.21일에는 통일사회당 등 혁신계가 모여서 중립화통일연맹을 만들고 이것이 주축이
되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13. 군내부 혁신세력의 성장과 혁명기도가 일어났다.
14. 군사혁명세력의 움직임은 4.19 이후 처음 정군운동(整軍運動: 군사혁명의 주도자 모임인
정군파의 운동)으로 시작되어 사회전반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5. 1960년 5월 2일에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소장이 송요찬 참모총장을 찾아가
군부에서의 3.15부정선거와 각종 군부의 비리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권고한
일이 일어났다.
16. 1960.5.8.일에 육군정보참모부를 중심으로 한 김종필외 육사 8기생 8명이 정군을 위한
연판장(여러명이 서명한 글)을 작성하였다가 국가반란음모라는 죄목으로 사직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17. 김종필외 이들은 과도정부에 정군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정군을 위한 구체적인 시안을
마련하도록 건의서를 제출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8. 장면정권이 들어서서도 정군파(整軍波)는 외면당하였다.
19. 정군파의 영관급 장교들은 1960.9.10일 방문 건의 등의 평화적 방법으로는 정군을 추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른바 충무장결의(忠武莊決議)를 통하여 투쟁방향을 정군운동
에서 군사혁명으로 급선회하였다.
20. 그 뒤 박정희소장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전임되고 김종필이 예편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자 정군과 구국을 목표로 하는 혁명조직의 규합과 확대에 전념하게 되었다.
21. 혁명조직이 중심이 되어 1961.4.15.일에 해병대 단독으로 군사혁명을 일으키려 한 계획이
있었으나 육군계획과 횡적제휴가 이루어져 단독계획을 보류하고 5.16혁명주체세력은
박정희소장의 지휘아래 전후 4차에 걸쳐 혁명계획을 세우고 1961.5.16.일 새벽에 해병
제1여단장의 지휘로 출동하게 되어 서울시내로 진입하여 서울시청 서울시경찰국과
방송국 등을 새벽 4시 30분경에 접수하였다.
22. 혁명군은 서울 전역을 장악하고 지방에서도 중요도시인 대구 부산 광주 대전 등지를
장악한 데 별 어려움이 없이 전국을 장악하였다.
23. 혁명군은 이날 상오 5시에 서울중앙방송국 첫방송을 통하여 우리 군부가 궐기한 목적과
혁명공약 6개항을 발표하였다.
◉ 목적
현정권과 기성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
(百尺竿頭)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 혁명공약 6개항
1. 방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
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
인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
한다.
6. 이와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
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또한 방송은 이 날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되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통합 장악한다고 발표하였다.
* 5.16군사혁명이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을 비롯한 일단의 정군파(整軍波)가
거사한 군사혁명이다.
* 6.25.전쟁 이후 극심한 생활고와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고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정부
가 물러나고 의원내각제인 제4대 윤보선이 민주당으로 신파의 협상으로 대통령으로 집권하
였다.
그러나 민주당 구파에서 국무총리를 선임하지 못하고 신파인 장면이 국무총리가 선임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 등을 처리를 못하고 학생데모 노총관계 데모 등 무수히 일어났다.
곧 나라의 혼란을 초래한 제2공화국의 장면(張勉)정부를 쓰러뜨리고 군부에 위한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 혁명주체들은 거사 당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3일 만에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범
시켰다.
◉ 박정희 대통령의 최고 치적으로 꼽는다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
을 만드는데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한 달 전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사업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한데 있다.
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우리나라 단군기원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의 역사와
세계 역사의 연대를 비교하여 기록하여 놓았다.
세계에서도 이러한 역사서가 없을 것이다. 하여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서 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만드는데 있어서 그 기초를
박정희가 세웠으며 이를 기초로 하여 전두환 시대에 착수하여 거의 마무리를 하여 노태우
시절인 1991년도에 27권이 완료 되었다. 그 후 김영삼 때 보유편 1권이 1995년도에 완료
되었다. 현재는 총 28권이 있다.
이 위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각 학교의 학급마다 비치해 두어 역사와 문화와 기술
분야와 각 학문에 연구를 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그 외 자주 자립 협동의 정신인 새마을 운동 등이 있다.
상기의 글은 홍익역사단지(弘益歷史團誌) 천자문(千字文)의 본문에 나오는 글입니다. 현재 13마당 까지는 전자책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나머지는 열심히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곧 역사와 교훈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역사란 많은 사람을 살리는 길이 들어있다고 봅니다.
많은 지적과 많은 격려를 바라옵니다.
그 외 등을 전자책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학문과 사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桓紀 9213년 神市開天 5914년 檀紀 4349년 丙申年(병신년) 西紀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삼라만상을 좋아하는 心操彿山(심조불산) 庸史(용사)
* 나머지 자료와 참고문헌은 제 블로그(자료실 또는 홍보실) 첫 글인
천지인(天地人)방으로 http://blog.naver.com/hhs0203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