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0일 자신의 트위터에 "우리는 이긴다(We will win)"는 의지를 표출하면서 대법원 소송에 모든 정치생명을 거는 도박을 시작했다. 경합주를 상대로 동시다발적으로 제기한 소송의 요체는 사기성 투표 가능성과 이에 다른 엄격한 재검표 적용이다.
이를 통해 재검표 과정에서 바이든을 선택한 투표 용지를 현미경 검증으로 소각시켜(서명 오류 등 사유) 역전을 모색하겠다는 전략이다.
그의 청구 취지를 각 주 하급 법원과 주 대법원, 나아가 이를 최종 검토할 연방대법원이 얼마큼 인용할지가 내달 세계적 관심을 모을 전망이다.
미국 현지 매체들은 안갯속 소송전이 시작된 상황에서 지난 2000년 벌어진 역사적 '부시 vs 고어' 재검표 소송전에서 그 답을 유추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사법부 판단의 향배를 유추하자면 판세를 뒤엎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꿈과 달리 사법적 판단은 대단히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대선 직전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명했지만 연방대법원의 태도 역시 각 주의 선거법률과 선거사무 절차가 지닌 고유성과 역사성을 존중하는 현실이다. 수검표를 비롯한 강력한 재검표 절차가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의 바람이 무색하게 사법적 판단은 투표를 둘러싼 부조리(Irregularity)에 대해 '명백한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 20년 전, IBM 엉터리 개표기에 무너진 대권의 꿈
트럼프 불복소송 전 미국 대선 역사에서 최악의 선거 분쟁은 정확히 20년 전 발생했다.
바로 IBM이 만든 '천공식 개표기'와 일명 '나비날개' 투표용지 탓에 당시 엘 고어 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권 야망이 사라지고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가 대권을 차지했다. 투개표에 적용되는 기술적 문제가 명백히 나타났음에도 고어 후보의 재검표 소송이 보수적 사법적 판단(대선 절차의 안정적 유지)에 의해 좌절된 것이다.
각 주의 연합체인 미국은 주별로 다른 선거법과 투표 용지를 사용한다.
그런데 플로리다주 팜비치 카운티가 2000년 대선에서 사용한 나비 날개 모양의 투표 용지가 그해 대선에서 역대 최악의 분쟁을 일으켰다.
이 투표용지를 보면 왼쪽 맨 상단에 공화당이 부시 그리고 오른쪽 상단은 개혁당의 팻 뷰캐넌, 그리고 다시 왼쪽 두 번째가 민주당의 고어 순으로 돼 있다.
그런데 고어 지지자들이 투표 용지를 보는 순간 부시가 왼쪽에 있는 만큼 오른쪽에는 당연히 고어가 있을 것으로 보고 투표용지 두 번째 구멍(팻 뷰캐넌 선택) 을 천공했을 것이라는 게 고어 측 주장이다. 실제 많은 유권자들이 팜비치 카운티에 "구멍 순서를 착각해 두 개를 동시에 뚫었다가 무효표가 됐다"고 주장하면서 투표용지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됐다.
1월 7일 대선일 후 개표를 진행해보니 우려는 현실로 다가왔다. 민주당이 쉽게 승리를 얻을 것으로 예상됐던 플로리다주에서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표를 할수록 부시 후보가 약진해 마침내 1784표 차이로 초박빙 승리를 기록한 것. 이와 함께 투표지 우측 옆날개에 위치한 뷰캐넌 후보 지지율이 다른 주 평균보다 팜비치 카운티에서 4배 이상 현저히 높게 나타났다.
투표용지를 둘러싸고 중대한 무효·혼선표가 양산됐음을 직감한 고어 캠프는 즉각 불복 절차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 음모론은 그 때도 있었다…"나비 투표용지, 부시 당선 목적으로 조작"
개표가 마무리되고 초유의 접전이 확인되자 플로리다주는 주 법률에 따라 즉각 재검표에 돌입했다.
이는 양 후보의 요청에 관계 없이 이뤄진 것으로 플로리다주 선거법은 개표 결과 후보 간 격차가 0.5% 이내인 경우 기계로 재개표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개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784표였던 격차가 930표로 줄어 양 후보 간 격차가 0.016%가 됐다. 이에 고어 후보 측은 기계가 아닌 수작업 재검표 요구를 요구하고 △마감시한에 못 맞춰 인정되지 못한 고어 지지표 합산 △수작업 재검표기 이뤄진 일부 카운티에서 기계 재검표만 유효하게 인정하는 문제 등을 다루는 불복 소송을 재기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고어 후보가 '수작업' 재검표를 강조했다는 것인데, 이는 골칫덩어리인 IBM의 천공 방식 개표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미국 IBM사가 개발한 이 구식 천공 방식 개표기가 600만명 이상 유권자와 25명의 선거인단을 거느린 플로리다주에서 팜비치 카운티를 비롯해 주 내 67개 카운티 중 27개 카운티(49%)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어 후보 측 변호인단은 팜비치 카운티의 복수 투표(한 후보가 아닌 여러 후보를 찍어 무효표가 되는 것) 사례가 다른 카운티보다 평균 두 배 높은 점을 소송에서 환기시키며 천공 방식의 구식 투표용지와 개표기 오류가 이 같은 무효표 양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했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플로리다주가 부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의도적으로 나비 날개 투표용지를 사용했다"는 음모론까지 흘러나왔다.
플로리다주가 "나비 날개 투표 용지를 쓰는 것은 고령 유권자를 위한 노력이었다. 투표 용지를 두 페이지로 펼쳐 더 크게 인쇄된 각 후보의 이름을 확인하고 정확하게 투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 음모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 잔인한 운명의 장난…합리적 의심에 재기한 '수작업' 요구가 패배 원인 돼
2000년 고어 측 소송은 소송 전략과 판결 내용에서도 영화 엔딩처럼 극적 반전을 연출했다. 엔딩의 정서는 비극이다.
구식 투개표 문제가 합리적 불복의 명분이 되고 많은 지지여론을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수작업 주장이 엘 고어의 소송 패배를 야기한 '자살골'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은 600만표가 집중된 플로리다주에서 일일이 손으로 재검표 작업을 했다가는 12월 하순에 진행되는 대선 선거인단 투표 일정에 차질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물론 고어 측은 수작업이 향후 선거인단 선거 절차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주장했지만 최고법원은 행정·사무 절차에서 선진국 답지 않게 '느림의 미학'을 자랑하는 미국의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대법원은 정확한 재검표보다 향후 선거일정의 안정적 유지에 방점을 찍고 고어 후보 주장을 5대4의 결정으로 배척했다.
5대4라는 박빙의 수치는 당시 최고법원 내에서도 수작업 재검표를 허용할지를 두고 입장이 첨예하게 갈렸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방대법원 판단이 나오자 고어 캠프는 크게 상심했고,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사법부가 고유 권한을 가진 플로리다 주의 재검표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켜 공화당·부시 정권 창출에 가담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엘 고어 후보는 연방대법원 결정에 따라 12월 12일 플로리다 주 의회가 "우리 주 최다 득표자는 조지 부시 후보다"라고 공식 선언하자 미련 없이 승복 절차에 착수했다. 전국 득표에서 부시 후보를 50만표 앞지르고도 플로리다주의 낡은 투개표 방식으로 인해 25명의 선거인단을 부시 후보에게 빼앗겨 낙마한 자신의 현실을 미련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승복 선언에서 "(최고 권위의) 사법적 판단까지 정치의 영역에 끌어들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20년 전 엘 고어 후보가 만든 이 명예로운 전통이야말로 오는 12월 트럼프 대통령의 불복소송 전개 과정에서 판례법 국가인 미국의 각종 법률 문구를 능가하는 압박 기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 트럼프, 실력파 변호인단 구성도 난항
2000년 부시·고어 간 소송전이 전개된 플로리다주 순회법원과 주 대법원 법정에 착석해 심리 과정을 취재했던 데이비드 새비지 LA타임스 기자는 최근 CSPAN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그는 "당시 초유의 수검표 소송이 불거졌음에도 순회법원·주대법원이 양측 의견을 충분히 들으려는 개방된 태도를 보인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미국 연방대법원이 개별 현안에 대한 판단을 시도하기보다 플로리다주 하급 법원과 주대법원의 고유 결정 권한을 최대한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전했다. 연방대법원은 플로리다 주 선거법에 대해서도 다른 주와 왜 다른 모습을 갖게 됐는지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새비지 기자는 당시 두 후보가 확보한 정예 변호인단 위용에 주목했다. 부시·고어 후보는 공교롭게도 '변호사 출신·국무장관 역임'라는 동일한 경력을 가진 제임스 베이커(부시 후보 변호인단 대표)와 워런 크리스토퍼(고어 후보 변호인단 대표)를 확보해 한 달 간 양보없는 법리 공방을 벌였다.
이 중에서도 새비지 기자는 이 중에서도 부시 후보 진영에서 테드 울슨 변호사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하버드대 현직 교수이자 헌법학 전문가인 고어 후보 변호인을 상대로 테드 울슨 변호사의 법리 공방이 부시 진영의 승리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대거 불복소송을 낸 트럼프 대통령 역시 법정 승리를 위해서는 20년 전 공화당이 보유한 막대한 변호인단 조력이 필수다. 그러나 최근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결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최고의 승부사로 평가 받은 테드 울슨 변호사의 경우 이미 2018년 특검 조사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한 차례 러브콜을 받았지만 '트럼프팀' 합류를 거부했다. 이 전설의 변호사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리 생각을 고쳐먹어도 '고객이익 보호'의 동기와 내적 자긍심을 확보할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선거불복 소송 역사에서 최고의 경험을 축적한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도 최근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베이커 전 장관은 대선 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지만 대선일 뒤 트럼프 대통령의 개표 중단 요구가 나오자 "모든 개표 활동은 계속돼야 한다"며 돌연 트럼프 캠프에 반기를 든 상태다. 공화당 주류에서 트럼프발 진흙탕 소송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 부시 변호사로 활약했던 존 볼턴, 대선 일주일 전 무서운 예측
당시 부시 후보를 도왔던 공화당 진영 변호사 명단에는 존 볼턴이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전통적 매파 관료로 익숙한 그는 사실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인물이다.
볼티모어 출신인 그는 예일대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뒤 같은 대학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대 후반에 로펌 컨빙턴앤드벌링에서 변호사로 뛰었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법무부 차관직까지 올랐던 그는 2000년 이후 부시 정부에서 UN대사 등 국제관계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2000년 재검표 사태가 불거지자 부시 진영 변호인단에 합류해 팜비치 카운티의 선거조사위원회에 공화당 측 위원으로 합류했다.
당시 재검표 현장 사진을 보면 하얀 콧수염을 기른 볼턴 당시 조사위원의 얼굴이 예외없이 등장할만큼 그는 열정적으로 재검표 과정에 참여해 고어 후보 측에 유리하게 반영된 무효표를 한 표라도 더 찾아내는 데 주력했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20년 전 초유의 선거 분쟁 당시 탁월한 선거조사위 경험을 가진 볼턴의 조력이 시급하다.
그러나 기대고 싶어하는 마음과 달리 그에게 섣불리 SOS를 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했다가 상종하기 힘든 '매파 관료'라며 작년 9월 그를 경질했다.
역으로 볼턴은 지난 6월 '그 일이 일어났던 방'이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트럼프는 무식했고 국제정세에 대해 무지하다 할 정도로 몰랐다"며 최악의 리더로 규정했다. 그의 안보 통치행위를 어린이 불장난 식으로 평가하는 볼턴이 트럼프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인다.
이와 관련해 볼턴은 트럼프의 진흙탕 소송전 가능성을 일찌감치 예측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자신의 트위터에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아, 팜비치 카운티에서 과거 멋진 나날들!"이라는 글을 올렸다.
사진에는 팜비치 카운티 조사위원으로 활동하며 현장에서 재검표 투표지를 집중해 지켜보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대선 후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방식으로든 불복 소송을 낼 것이라는 점을 20년 전 치열했던 팜비치 카운티 재검표 사태로 암시했던 것이다.
한편 플로리다주는 300억원을 들여 2000년 논란이 된 천공 방식의 낡은 개표 시스템을 2004년부터 터치 스크린 방식으로 바꿨다. 고어 후보의 대선 승리를 탈취한 범인이 바로 낡은 개표 기술이었음을 4년 뒤 플로다주의 투개표 시스템 변경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IBM의 낡은 천공 투개표 시스템은 현재 플로리다주 박물관과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역사 유물로 보관되고 있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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