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이지만 잘 차려입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발레·오페라 공연을 보러가는 것. 크리스마스·연말 시즌 '위시 리스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 프랑스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파리의 명물 가니에르·바스티유 극장에서 원하는 시간에 공연을 보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다. 국립 파리오페라발레단(POB)의 악기 연주자, 발레리노와 발레리나들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연금 개혁'에 반대해 거리 시위에 나서면서 파업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난 17일(현지시간)을 전후해 발레단 단원들은 연말 시즌 인기인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 발레 음악 대신 "들판의 소리가 들리는가, 피묻은 깃발이 일어났다"는 가사를 담은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연주하면서 시위에 나섰다.
한 때 '프랑스 군주제'의 사치품처럼 통했던 파리오페라발레단이 군주제에 대항한 시민혁명의 상징곡이자 국가인 라마르세예즈를 목청 높여 부른 이유는 마크롱 대통령이 단원들 퇴직 연령 등을 단순화해 사실상 기존 연금을 축소하는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노동 조합들의 시위와 다를 것 없어 보일 지 모르지만, 발레단 같은 경우는 가뜩이나 가난하고 배고픈 예술을 하는 예술가들을 상대로 정부가 가차 없는 개혁 칼날을 들이댔다는 점이 비난 포인트가 됐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이 전했다.
연금 체계 단일화 개혁을 추진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 22일(현지시간)개혁을 위해 본인의 특별 연금과 특혜부터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진 출처=마크롱 대통령 트위터]
요즘 마크롱 정부는 '덜 내고 더 받는 연금 체제를 효율화한다'는 취지로 현재 직종·직능 별로 42개에 달하는 퇴직연금을 단일화하고, 이를 통해 나라 재정 부담을 줄이겠다는 개혁을 추진 중이다. 노동 조합들은 "연금 지급 시점을 늦추고 연금 액수도 줄이려는 것"이라면서 "정년 나이까지 늦추는 나쁜 법"이라고 반발하면서 시위에 나선 상태다. 각계에서 연금 개혁 반발이 일고 항의 시위가 20여일 이어지자 지난 22일 마크롱 대통령은 "대통령인 나부터 모범을 보이겠다"면서 프랑스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퇴임 후 매달 지급되는 연금과 특혜를 전부 내려놓을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다만 발레단에 대한 그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은 문화예술 정책의 모범 사례로도 꼽혀왔다. 프랑스에서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성악가와 발레 무용수들이 '신체 혹사 직업군'으로 분류돼 정규 단원인 경우 만 42세 은퇴가 보장되고, 나라가 이들이 다른 직업을 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차원에서 퇴직 후 최소 1067유로(우리 돈 약 138만원)씩 연금을 이들에게 지급해준다.
1653년 당시 발레 공연에 주역으로 나선 `절대 군주`이자 발레 댄서 루이 14세.[출처=위키피디아]
이런 예술가 지원 관행은 사실 왕정 시기인 1698년에 나왔다. 발레를 사랑했던 당시의 '절대 군주' 루이 14세는 파리오페라발레단(당시 명칭은 왕립음악원)의 장바티스트 륄리 감독이 사망하자 륄리씨의 부인과 자녀, 주요 단원들에게 연금을 주도록 했다. 프랑스 문화 역사가인 빈센트 지루씨는 NYT인터뷰에서 "프랑스에선 언제나 권력과 예술이 서로 연결돼 있었다"면서 발레단은 왕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언급했다.파리오페라발레단은 프랑스 왕정기 '태양 왕'이라고 불리던 절대 군주 루이 14세가 1671년에 만든 국립 예술단이다. 루이 14세는 임기(1643년 5월~1715년 9월)동안에도 직접 공연 무대에 올랐는데, 그가 만든 파리오페라발레단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발레단이라는 명성을 자랑한다.
다만 유럽 다른 국가들처럼 프랑스에서도 19세기를 전후해 자본주의와 더불어 이른바 '복지국가' 시대가 열리면서 왕의 특혜는 예술가의 권리로 바뀌었다. 파리 거리 시위에 나선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알렉스 카르니아토(41) 무용수는 "우리의 일은 스포츠 선수와 다를 바 없다"면서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축구를 사랑한다. 만약에 축구 스타가 40대까지 의무적으로 경기장에서 뛰어야 한다면 모두가 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직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퇴직 연령 등을 단순화하는 체제 개편을 강행하는 것은 부상에 시달리는 무용수들에게 가혹하다는 것이다.
발레를 비롯한 무용계에서 예술가들이 실제로 40세까지 활동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만 30세를 전후해 은퇴하는 경우가 수두룩하기 때문에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40)씨와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수석 무용수인 미스티 코플랜드(37)씨 등이 지금도 활동하는 것은 글로벌 무대에서는 눈에 띄는 사례다.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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