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한꺼번에, 또는 단일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연대를 창출하는 구체적인 성취를 통해 건설될 것입니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트 슈먼은 제1·2차 세계대전으로 갈가리 찢긴 세계평화를 희구하며 유럽공동체 구상을 발표했다. 세계대전의 '희생자'였던 프랑스가 독일에 손을 내밀며 공동체의 미래를 모색하자고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럽은 1957년 3월 25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럽경제공동체(EEC) 설립을 골자로 하는 '로마조약'을 체결했다. 초기에는 6개국으로 출범했지만 이후 1993년 유런연합(EU)으로 발전, 28개 회원국 기구로 성장했다. 세계 최대 단일시장, 단일통화라는 '유로존' 창설 등 EU는 세계사적으로 의미 있는 행보를 걸어왔다. 하지만 '회갑'을 맞은 EU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협상 돌입에 따라 최대 위기에 빠졌다.매일경제는 EU 집행위원회가 발간한 '유럽의 미래'라는 제목의 백서(WHITE PAPER ON THE FUTURE OF EUROPE)를 단독 입수해 향후 EU 미래를 예측해본다. EU 집행위는 지난 29일 영국이 EU에 통보한 브렉시트를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27개 회원국 체제를 대비해 미래상에 대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지구촌 통합 질서의 모범 EU
EU는 지난 60년 동안 1·2차 대전의 참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힘써왔다. 양차대전의 발발이 유럽에서 일어났던 만큼 그 책임을 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의 노력은 2012년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입증됐다. 또 국제연합(UN)에서 평화수호 프로젝트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곳도 EU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EU 리스본 조약 42조는 EU의 한 국가가 위험에 처했을 때 다른 모든 회원국이 지원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며 "한 나라가 겪는 위험은 모든 EU 국가들이 겪는 위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U의 '단결성'은 지난 60년간 EU의 견고함을 지켜준 주요 요소였다. 지난 2015년 프랑스 파리 연쇄테러로 프랑스가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 EU 회원국들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지원에 나섰다.
EU가 다른 국가연합들과 가장 다른 점은 단일화폐와 단일시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수준이 서로 다른 국가들임에도 단일시장을 통해 포용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려 노력했다. 국제통화기구(IMF) 통계에 따르면 EU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995년 9조5990억달러(약 1710조6000억원)에서 2015년 16조3004억달러(약 1경8191조3000억원) 성장했다. 경제수준이 매우 낮은 후발 회원국들도 단일시장 혜택 속에 같은 기간 GDP가 10배 정도 증가하는 성과를 거뒀다. 대표적으로 폴란드는 2004년 EU 가입 후 10년간 GDP가 46% 성장하는 '신화'를 거뒀다,
단일시장의 혜택은 경제성장에서 멈추지 않았다. EU 국가 간 자유로운 이동과 노동으로, 현재 타 EU 국가에서 근로하고 있는 시민들의 수는 650만명에 육박한다. 지난 2015년부터 추진된 '디지털 싱글 마켓'으로 로밍 요금이 2007년에 비해 90% 가량 감소했으며 이마저도 조만간 없어질 예정이다.
◆노쇠해진 EU의 그림자
EU의 결속력 강화는 되레 60년이 지난 현재 위기로 작용하고 있다. EU가 이민, 통화정책 등 회원국들을 강제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잠복했던 온갖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게 브렉시트다. 여기에 동시다발적 테러, 극우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정당의 득세가 한꺼번에 나타나면서 EU의 통합체제가 급격하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유럽 와해 위기가 더 생생한 실체로 다가왔다"며 "유럽이 앓는 가장 깊은 문제이자 원인이 한꺼번에 표출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브렉시트는 다른 회원국들의 탈퇴 도미노 가능성을 자극하고 있다. 영국이 브렉시트 연착륙에 성공할 경우 그리스 등의 연쇄 동요가 우려된다. 자국 통화를 부활시켜 경제회복을 노렸던 그리스 좌파 정부 시도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언제든 그렉시트(그리스의 EU 탈퇴) 논의가 재부상할 수 있다.
EU가 직면한 난제 중 난제는 국경 문제다. 난민이 대거 유입되고 테러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회원국 간 자유 통행을 보장해온 솅겐조약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 5개국은 난민 및 테러 대응을 이유로 한시적으로 국경을 통제하고 있고, 일각에서는 국경통제를 영구화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극우 정당들의 부상도 EU의 통합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지난 15일 네덜란드 총선에서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자유당(PVV)이 미풍에 그쳤지만 올해 4~5월 예정된 프랑스 대선과 9월 독일 총선에서 극우 정당이 약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젊은 세대의 실업과 빈곤도 EU의 미래를 짓누르는 문제다. EU 전체의 청년실업률은 지난해 20.4%에 달한다. 특히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국가들의 청년실업률은 유럽 평균을 크게 웃돌고 있다. 2015년 기준 그리스는 49.8%, 스페인은 48.3%의 청년실업률을 기록했다 .
이로 인해 EU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무용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EU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EU를 신회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불과 3분의 1만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난민 장벽 높이고 통화자율성 확대로 미래 꿈꾸는 EU
EU 집행위원회는 브렉시트로 촉발된 EU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백서를 발간했다. EU는 브렉시트를 기정사실화한 27개 회원국의 미래상을 논의, 2025년까지 제시할 방침이다. 2025년은 EU가 회원국 분담금 문제 등 중기 재정계획에 따라 제시된 로드맵이다.
EU는 그동안 권한이 더 많은 EU냐, 더 작은 EU냐라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잘못을 시정하려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런 접근법이 EU 미래를 너무 단순화한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다.
EU는 백서에서 ▲현 상태 유지 ▲단일시장 제외 모든 공동협력분야 대폭 축소 ▲협력 강화 원하는 국가끼리만 협력 강화 ▲불필요한 부분 줄이고 효율적으로 ▲협력 전면 강화라는 5가지 시나리오로 ▷단일시장 ▷통화정책 ▷솅겐조약 ▷외교정책 ▷예산 ▷예측 결과라는 소주제로 분석했다. EU는 1차 논의 결과를 올해 연말 발표하고 2025년 중기 재정계획이 종료되면 최종 확정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5가지 시나리오 가운데 '현 상태 유지'와 '협력 전면 강화'는 배제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난민 문제와 통화정책에 있어 '지나친' EU 통제성에 회원국들이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가 EU 회원국들의 난민 쿼터제로 촉발될 게 대표적인 이유다.
이 때문에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는 단일시장을 유지하고 외교 및 안보 문제에서는 현 상태를 유지한 채 난민 문제와 통화정책에서의 회원국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느슨한 형태의 EU'가 될 전망이 높다.
이러한 점에서 '불필요한 부분 줄이고 효율적으로'이라는 시나리오가 가장 유력하다. 이 시나리오는 무역과 규제에 관련해서 EU공동 기준을 강화한다. 아울러 모든 외교와 국방 정책과 관련해서는 동일한 입장을 천명하게 된다. 이는 그동안 유럽방위의 근간이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기반한다.
다만 난민 문제에 있어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 솅겐조약은 문턱을 낮출 것으로 예견된다. 하지만 이 조약은 EU가 회원국들에 난민을 강제 할당하는 데까지 발전하는 근거가 돼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영국을 위시해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에서 난민문제를 겨냥한 탈(脫)EU 극우정당들은 공격의 단골메뉴로 삼고 있다.
유로존이라는 단일통화 정책에 집착해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경색됐다는 비판이 쇄도한다는 점에서 통화정책의 유연성 확대도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EU의 통화정책은 유럽중앙은행(ECB) 통제 하에 있다. 하지만 최근 주요 회원국들의 ECB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유로존 국가들은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외환정책을 단독으로 펼칠 수 없다.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으로 ECB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갖고는 독일은 ECB와 통화정책기조를 두고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양적완화를 확대하려고 할 때마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비판했다. 쇼이블레 장관은 독일이 유로 환율 정책을 설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달러 대비 유로의 약세의 원인이 ECB에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독일은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보장받으려 한다.
이탈리아 3위 은행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인 몬테 데이 파스키 디 시에나(몬테 파스키) 구제금융 문제가 교착 상태에 빠진 것도 EU의 지나친 경직성 비판 이유로 꼽힌다. 이탈리아 정부는 지난해 말 재정위기에 몬테 파스키 구제를 위해 65억유로(약 8조1911억원)를 투입키로 했다. 하지만 ECB의 단일은행감독기구(SSM)와 EU 집행위원회는 구조조정안의 선결 제시를 내놓으라고 하고 있어 몬테 파스키 구조조정은 표류하고 있다. EU 회원국 내 정부의 구조조정 자금 집행 승인권을 EU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 이유다.
EU 집행위원회는 '불필요한 부분 줄이고 효율적으로' 시나리오 효과에 대해 "초반에 협의 과정이 복잡할 수 있으나 한 번 자리잡으면 의사결정 과정 등이 훨씬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장원주 기자 / 박의명 기자 / 김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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