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행정부의 대 아시아 외교 정책인 피봇투아시아(Pivot to Asia)가 정권 말기 급속히 흔들리고 있다. 피봇투아시아는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야심차게 선언한 것으로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근간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정권 말기 들어 일부 아세안 국가들이 돌아서는 징후가 농후하다. 이처럼 아세안 국가들의 ‘원미친중(遠美親中·미국을 멀리하고 중국과 가까와진다)’ 정책이 아시아지역에선 ‘피봇투차이나(Pivot to China)’외교 노선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힐러리가 피봇투아시아에 대한 애착이 큰 것으로 알려지면서 미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아세안은 피봇투아시아와 피봇투차이나의 충돌로 외교적 격랑이 거세게 몰아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미국의 피봇투아시아 정책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피봇투차이나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
피봇투차이나의 실체는 아세안 일부 국가들이 역내 패권 국가인 중국에 대항하기보다 순응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아시아의 대표적인 미국 동맹국이었던 필리핀이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이후 친중 외교노선을 천명했고, 나집 라작 말레시이아 총리도 현재 중국을 방문중에 있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전통적인 친중 국가다.
최근 피봇투차이나 흐름이 관심을 끄는 것은 이같은 외교적 노선이 가속화되면 역내 미국과의 패권 다툼은 중국 우위 국면을 형성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피봇투아시아 정책에 그나마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국가는 일본 싱가포르 한국 등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몇개 국가에 불과하다.
피봇투차이나 흐름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아세안 국가들의 반전이다. 7월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들에 대해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 아세안 국가들이 미국측으로 쏠릴 것이란 예상도 나왔지만중국은 국제법 효력을 지닌 이 판결을 무시했다. 이후 남중국해에서 인공섬을 건설하고 군사기지를 만드는 등 영토 확장 정책을 지속했다. 이 때 아세안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중단하라”는 선언을 발표하는 것 말고는 사실상 없었다. 동남아 국가들이 단일 전선도 깨지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두테르테는 피봇투차이나 쏠림의 ‘티핑 포인트’로 작용했다. 두테르테가 미국과의 관계 단절을 천명하며 친중 외교 노선을 들고 나온 것은 이럴 바엔 “차라리 실리를 챙기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로 분석된다. 미국은 피봇투아시아 정책을 펴면서 중국을 역내 안정을 해치는 ‘공격자’로 규정하며 그동안 공세를 펴왔지만 이같은 미국의 전략은 중국의 커진 경제 덩치에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두테르테는 방중 전 “자국의 진정한 경제 현대화를 달성할 자원을 중국이 가지고 있다”고 했고, 귀국길에 철도 등 기간 산업 투자 등 15조원에 가까운 경제 지원 보따리를 가지고 왔다. 두테르테는 중국의 일대일로에도 참가할 뜻을 가지고 있다.
두테르테 발 아세안 국가들의 피봇투차이나 흐름은 최근 다른 국가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지난달 31일 부터 이달 6일까지 일주일동안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나집 라작 총리는 방중전 “중국이야말로 진정한 친구이고 전략적 동반자”라면서 중국을 향해 호의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양국도 신 밀월 시대로 접어들 수 있다는 관측은 말레이시아가 중국산 순시선을 최대 18척까지 구매할 것이라는 소식이 잘 보여준다. 나집 라작 총리의 방중전에는 주로 투자측면에서만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도 두테르테 처럼 중국으로 부터 경제적 실리를 기대하고 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러시는 “만일 남중국해 영토분쟁을 둘러싼 긴장을 당사자들이 협력적 방식으로 푼다면 같은 위치의 다른 국가들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이는 미국의 재균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반전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에 철저한 미국과 이에 무관심한 중국의 차이에도 영향이 있다. 두테르테는 ‘마약과의 전쟁’에 미국이 인권문제를 거론하자 자존심이 상해했고, 나집 총리는 자신이 연루된 1MDB 뇌물 스캔들 사건에 대해 미국이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이면서 감정이 좋지 않아졌다.
이와 관련해 포린폴러시는 남중국해를 두고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베트남도 중국과 관계 개선 행보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포린폴러시는 “지난 8월 베트남 국방부 장관이 마오쩌둥 묘를 방문한 것은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9월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는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리커창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베트남은 중국의 과거 대규모 원조를 잊지 않고 있다”면서 “베트남 외교의 최우선 관심사는 양국 관계”라고 강조했다. 지난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역사적인 베트남 방문 이후 벌어진 베트남의 이같은 행보는 분분한 해석을 낳고 있다.
랜달 슈웰러 오하이오 주립대 교수는 “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동맹은 (역내) 미국 우선주의의 쇠퇴와 중국의 경제적 부상으로 인해 지역 균형을 바꾸는데 역부족일 수 있다”고 밝혔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외에 전통적으로 미국의 우방 세력이었던 인도네시아 태국 등도 최근 자국의 이익에 따라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모색할 뿐, ‘친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있다.
[문수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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