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미국의 ‘중대장(lieutenant)’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이 지나면서 글로벌 정치·경제 질서를 장악한 미국은 영국을 가교로 유럽 대륙국가들의 통합을 지원하며 옛 소련에 대항하는 서방동맹’을 구축했다. 1989년 동유럽 붕괴 이후 영국은 일부 공산권 국가들을 서방동맹의 공동체 안에 포함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걸프전쟁 등을 비롯한 중동문제, 아프가니스탄 사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제재 등에서 영국의 활약은 눈부셨다. 외교가에서는 영국의 이런 지위를 ‘미들파워맨십’(Middlepowermanship)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브렉시트 때문에 이 관계는 뿌리채 흔들리게 됐다.
‘브렉시트’는 40년 이상 지속된 유럽연합(EU) 붕괴를 넘어 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이 넘도록 지속돼 온 미-영-유럽의 ‘서방동맹’에 중대한 균열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영국의 EU,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한 발언력이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미국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아프가니스탄 등의 지정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게 생겼다. 이는 미국의 이 지역들에 대한 영향력 하락을 의미한다. 이를 두고 이안 브래머 유라시아그룹 대표는 “브렉시트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최고의 지정학적 위기를 잉태했다”고 말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브렉시트는 결국 러시아의 부상 기회를 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영향력 약화는 스페인, 그리스, 심지어는 독일 내에서 불고 있는 극우주의 운동과 교묘하게 시기적으로 겹친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 ‘광풍’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미국을 괴롭힐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로버트 매닝 애틀란틱 카운슬 연구원은 “이번 결정은 세계화에 대한 역풍이라는 곤란한 국제적 흐름을 보여준다”며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러시아 뿐만 아니라 중동도 영국의 이탈로 인해 미국 입장에서는 더 큰 골치거리가 됐다. NATO는 물론이고 국제안보의 최고 협의체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미국 주도로 논의를 끌어나가기가 불편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유럽담당 연구원인 헤더 콘리는 “난민 위기와 IS 격퇴, 우크라이나 휴전협정 위반, 러시아 제재에 대해 미국이 유럽 동맹과 우방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어려워질 것”이라며 “유안 안전보장이사회와 나토에서 영국의 리더십을 필요로 할 때 영국은 내부로 눈을 돌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영국 지도자들의 자국 중심적 사고방식이 큰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2013년 영국 의회가 시리아에 대한 폭격을 결정할 때, 캐머론 총리는 영국 헌법상 그냥 명령하면 될 것을 굳이 의회 표결에 부쳤다. ‘면피용 표결’이라는 비판이 미국에서 일었다. 그 결과 정치적 타격은 캐머런이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결국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한데 대한 서방세계의 반격은 이뤄지지 못했다. 미국 국무부 직원 51명이 오바마에게 반기를 들면서까지 공습을 주장했지만 캐머론이 회피하는 문제를 오바마가 나서서 손에 피를 묻히기엔 어려웠다.
미국이 그토록 반대했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 갑자기 탄력을 받은 것도 사실상 미-영-유럽 서방동맹 보다는 자국의 생존을 우선순위에 뒀던 캐머론과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의 공동작품이었다. 중국의 자금투자 없이는 영국의 경제성장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이런 자국 중심주의는 브렉시트 논의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브렉시트를 지지했던 진영은 동쪽의 위협들을 잠재우는데 EU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줄리안 블레지어 영국 국회의원(국방위원회 소속·보수당)은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보스니아와 코소보 사태 때도 문제를 해결했던 것은 NATO와 러시아였지 EU가 아니었다”며 “EU의 군기빠진 회원국 군대 파병을 보고 있으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물론 향후 테러문제에 대한 대응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 영국국경국 대표를 역임한 롭 화이트먼 CIPFA 회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 “영국이 EU를 떠난다면 영국은 유럽 안보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영향력을 스스로 제한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지금 브렉시트 진영은 물론 영국 국민들이 크게 간과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 입장에서는 분노할 만한 일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실제로 지난 4월 영국을 방문해 “영국이 EU를 떠나면 미국이 EU보다 영국과 먼저 무언가를 협상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명한 경고메세지를 보냈다. 이 때문에 미국이 영국 대신 새로운 중대장을 찾을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24일(현지시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접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일성으로 “미국과 EU의 관계에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존 케리 국무장관, 제이콥 루 재무장관의 브렉시트 관련 성명 역시 “미국과 EU의 관계에 변함이 없다”는데 무게를 실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영국 국민의 결정을 존중하며 영국과도 외교관계를 변함없이 지속하겠다”고도 했지만 이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할 뿐, 무게중심은 EU와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데 있다고 봐야 한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 런던 = 신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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