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사납게 몰아치는 천둥번개를 뚫고 투표소를 찾은 런던 시민들의 표정은 착찹하게 굳어 있었다. 런던 근교 워킹 시내 투표소를 찾은 찰스 헤들리 (37·사립학교 교사)씨는 “새벽 1시부터 시작된 천둥번개가 밤새 계속돼 밤잠을 설쳤다”며 “투표후 아이들과 함께 영국과 EU 역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려 한다”고 말했다. 첼트넘에 거주하는 사이먼 리처드는 투표를 끝낸 뒤 트위터에 올린 인증샷에 “오전 7시가 되기도 전에 이렇게 투표소에 줄을 서는 광경은 처음봤다고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이야기 하더라”며 브렉시트 국민투표에 쏠린 영국민들의 관심을 그대로 보여줬다. 일단 현실적으로 EU잔류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지만 이날 국민투표 실시전에 발표된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는 탈퇴·잔류가 박빙인 것으로 나왔다. 국민투표는 한국시간으로 24일 오전에 마무리되는데 평소 선거때마다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해왔던 공영방송인 BBC는 23일 저녁 10시(현지시간)투표가 끝난뒤 자체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브렉시트 지지·반대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오차 범위내 접전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확실치 않은 출구조사를 발표했다가 금융시장 혼란을 키울 수 있다는 자체 판단때문이다. 실제로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는 사실상 ‘깜깜이’ 선거를 예고 했다. 4개 여론조사결과 중 2개는 ‘잔류’쪽, 나머지 2개는 ‘탈퇴’쪽이 우위를 보인 것으로 집계됐다. 유고브가 더타임스 의뢰를 받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잔류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51%로 ‘탈퇴’(49%)를 2% 포인트 앞섰고 데일리메일과 ITV가 콤레스가 발표한 전화 여론조사에서도 ‘잔류’가 48%로 ‘탈퇴’(42%)보다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여론조사업체 오피니움이 온라인조사에서는 탈퇴(45%)가 잔류(44%)를 1%포인트 앞섰고 TNS가 발표한 온라인조사 역시 탈퇴(43%)가 잔류(41%)보다 2%포인트 앞선것으로 나왔다.
팽팽한 여론만큼이나 브렉시트 잔류·탈퇴 여부를 떠나 영국과 EU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영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으로 치닫는 모습이다.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워털루 역 인근에 위치한 환전소 거리의 각 환전소마다 짧게는 20~30m에서 길게는 50m까지 긴 줄이 늘어섰다. 잔류든 탈퇴든 시장 불확실성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면서 통화 변동성이 커진 파운드화를 달러나 유로 등으로 미리 환전하려는 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된 때문이다. 그리스의 ‘그렉시트’ 투표 전날 아테네 도심서 나타났던 ‘공황 구매’(Panic Buying) 현상이 런던에서 그대로 재연된 셈이다.
워털루 역에서 가장 가까운 환전소에서 앞에선 만난 한 런던시민은 “가을 쯤에 해외 여행을 가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브렉시트 국민투표후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할까봐 미리 달러로 바꿔두러 왔다”고 말했다. SNS에선 탈퇴파 여론이 강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지역에서 글래스고 정부 깃발을 온 몸에 감고 있는 사람들이 환전소 앞에 길게 줄서 있는 모습도 눈에 띄웠다. 런던 우정국에 따르면 각 외환취급소와 온라인을 합쳐 이번주만 달러·유로 등 외환 판매가 작년 동기 대비 74% 껑충 뛰었고 22일에는 지난해 같은 날보다 381% 급증했다. 영국 정부도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폭풍에 대비하는 비상대책 시행에 들어갔다. 영국의 건전성감독청은 23~24일 동안 시중은행들에 “현금인출기를 현금으로 가득 채우고, 작동이 잘 되는지 점검할 것과 주요 직원들은 휴가를 가지 말고 전산 시스템 개선 작업도 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혹시 모를 ‘뱅크런’ 사태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일간 텔레그래프는 23일 “브렉시트 우려에 일각에선 금뢰를 사서 집안 금고에 쌓아두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정용 금고(home safe)’라는 용어를 구글에서 검색하는 일일 빈도도 최근 급증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난 2008년 11월 당시의 61% 수준에 달했다.
캠페인 열기가 정점에 치닫자 아일랜드 저가 항공사 라이언에어의 마이클 오리어리 라이언 에어 회장은 투표전날 “영국이 잔류하게 된다면 유럽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상 최대 할인 행사를 할 예정”이라는 ‘깜짝 공약’을 내놨는데 금품을 동원한 투표 운동 아니냐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오렐리는 “24일은 국민투표가 끝난 뒤”라며 “탈퇴파인 보리스 존슨, 나이절파라지, 마이클 고브 등의 정치인들이 유럽을 잘 모르는 것 같으니 여행 좀 가서 공부하라는 의미”라고 되레 반박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주당 12억 유로에 달하는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영국인들의 관광수입도 상당해 탈퇴가 결정되면 아일랜드 항공사도 타격을 받는다.
무엇보다 이번 결과를 가장 걱정하는 것은 무슬림 이민자를 비롯한 이민자 출신 근로자들이다. 이날 영국 BBC방송에는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카페·식당 등에서 일하는 이민자 출신 근로자들의 인터뷰가 계속 뉴스에 나왔다. 영국 요식업의 경우 2014년 기준 21%가 EU 출신 이민자들로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런던시내 한 카페 식당 주인은 기자에게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뺏아간다는 불만이 많지만 커피를 만들고 서빙하는 일자리는 런더너들이 탐내는 일자리가 전혀 아니다”며 “저렴한 노동력을 구하지 못하면 식당이 문을 닫게되고 그때는 더 큰일이 발생할게 뻔하다”며 투표결과를 우려했다.
[런던 = 신현규 기자 / 서울 = 이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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