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믿을 수 없던 우승이었다.
번쩍번쩍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헹가래에 실려 훨훨 하늘도 날았다. 그러자 챔피언 티셔츠와 모자가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신나게 나눠 입던 순간, 김인식 감독(68)은 잠시 갸웃했다. ‘으응? 우리가 이렇게 자신만만했을 리가 없는데? 언제 우승 티셔츠까지 만들었지?’
왁자하게 기념사진을 찍는 와중에 김 감독은 주섬주섬 티셔츠를 살펴봤다. 우리 대표팀 유니폼 협찬사(D사)가 아닌 일본 대표팀 유니폼 협찬사, M사의 제품이었다. 챔피언 티셔츠와 모자는 대회 주최 측이 나눠준 물건이었다.
“컬러도 그렇고……. 그 라벨을 보니까, 이 사람들이 이걸 만들면서 누가 입을 줄 상상했을지 딱 알겠더라고. 고마우면서도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웃음).”
누군가 확신했던 우승.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냈던 기적. 지난 11월21일, 우리는 그렇게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12’의 초대 챔피언이 됐다.
2015년 한국 야구팬들을 찾아갔던 가장 드라마틱한 승전 하나를 남기고 김인식 감독은 지금 “더 바랄 나위 없었던 한 해”를 떠나보내고 있다.
“사실 9, 10월까진 정말 힘들었던 해였는데…….”
대회를 앞두고는 맘고생이 심했다. 준비는 촉박한데 든든하게 점찍었던 선수들의 ‘줄줄이 이탈’이 이어졌다. 시커먼 속을 끌어안고 건너갔던 대회, 개막전은 참담했지만 보름을 견디고 김 감독은 최후의 승장으로 남았다.
9회 3점차를 뒤집은 일본과의 준결승전은 한국 야구가 두고두고 기억할 명승부다. “98%로 완성할 수 없는 게 야구의 승부”라는 김 감독은 “일본이 채우지 못했던 2%를 우리가 파고든 경기”로 정리한다. 그가 진짜 승부수를 던진 이닝은 사상 최고의 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9회초가 아니라 그 드라마를 지켜내야 했던 9회말이다.
올해의 일본프로야구 MVP인 3번 야마다 데쓰토에 이어 대회 ‘4할타’를 휘두르고 있던 좌타자 쓰쓰고 요시토모가 나섰지만, “왼손타자에 바깥쪽 변화구를 떨어뜨릴 수 있는”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을 믿었다. 이후 동점주자가 나간 2사 1루에서 일본은 통산 300홈런의 강타자 나카무라 다케야를 대타로 냈고, 그는 왼손투수 상대 타율이 더 높았지만 한국이 맞불을 놓은 마지막 카드는 왼손 이현승이었다. “주자를 1루에 묶은 채 장타만 맞지 않으면 한 점차를 지킬 수 있다”는 계산. 한국 벤치가 ‘운명을 걸었던’ 투수 이현승은 나카무라를 내야땅볼로 잡아내면서 4-3의 스코어를 지켰다.
“쓰쓰고가 정대현의 공을 치거나, 이현승이 나카무라에게 맞았다면 (‘국민감독’이 아니라) ‘국민역적’이 됐겠지. 9회초 그런 뒤집기 끝의 리드를 못 지켰다면…….”
10년쯤 전에는 야구를 말하는 데 훨씬 더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그 때는 스스로 야구에 관한한 박사가 다 됐다고 확신했다”는 김 감독은 오히려 지금은 “아직도 한참 더 배울 야구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야구는 평생 새로운 벗”이라고.
기쁨과 영광, 후회와 상처의 역사와 사건들을 묻고 2015년이 저문다. 야구계의 어른이기도 한 김 감독의 2016년 새해 소망은 “더 깨끗하고 투명한 야구판”이다.
“사회가 이제 많이 맑아졌다. 구석구석 잘 보이고, 더러운 곳은 잘 들킨다. 이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지도자라면 그저 남들도 그런다거나 상황이 그렇다고 회피해선 안 되고, 늘 소신 있는 리더가 돼야한다. 예전보다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누리는 스타 선수들은 그만큼 팬들과 야구판에 더 무거운 의무가 있음도 알아야 한다. 야구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상식적인 야구계를 만들어야 할 책임을 나눠 갖고 있다.”
그가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2001년에 태어난 손자는 할아버지가 치러낸 두 번의 WBC 대회 때 너무 어렸다. ‘국대 감독’ 조부의 무용담을 글로만 보다가 이번 ‘프리미어12’는 신나게 지켜봤던 모양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할머니한테 그랬다더라”며 노 감독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뿌듯해한다. 그런 말은 직접 해주면 좋을 텐데 열다섯 살 소년의 무뚝뚝함이 못내 야속하지만.
야구를 하는 보람, 과연 작지 않다.
[chicleo@maekyung.com]
번쩍번쩍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헹가래에 실려 훨훨 하늘도 날았다. 그러자 챔피언 티셔츠와 모자가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왔다. 신나게 나눠 입던 순간, 김인식 감독(68)은 잠시 갸웃했다. ‘으응? 우리가 이렇게 자신만만했을 리가 없는데? 언제 우승 티셔츠까지 만들었지?’
왁자하게 기념사진을 찍는 와중에 김 감독은 주섬주섬 티셔츠를 살펴봤다. 우리 대표팀 유니폼 협찬사(D사)가 아닌 일본 대표팀 유니폼 협찬사, M사의 제품이었다. 챔피언 티셔츠와 모자는 대회 주최 측이 나눠준 물건이었다.
“컬러도 그렇고……. 그 라벨을 보니까, 이 사람들이 이걸 만들면서 누가 입을 줄 상상했을지 딱 알겠더라고. 고마우면서도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웃음).”
누군가 확신했던 우승.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냈던 기적. 지난 11월21일, 우리는 그렇게 야구 국가대항전 ‘프리미어12’의 초대 챔피언이 됐다.
2015년 한국 야구팬들을 찾아갔던 가장 드라마틱한 승전 하나를 남기고 김인식 감독은 지금 “더 바랄 나위 없었던 한 해”를 떠나보내고 있다.
“사실 9, 10월까진 정말 힘들었던 해였는데…….”
대회를 앞두고는 맘고생이 심했다. 준비는 촉박한데 든든하게 점찍었던 선수들의 ‘줄줄이 이탈’이 이어졌다. 시커먼 속을 끌어안고 건너갔던 대회, 개막전은 참담했지만 보름을 견디고 김 감독은 최후의 승장으로 남았다.
9회 3점차를 뒤집은 일본과의 준결승전은 한국 야구가 두고두고 기억할 명승부다. “98%로 완성할 수 없는 게 야구의 승부”라는 김 감독은 “일본이 채우지 못했던 2%를 우리가 파고든 경기”로 정리한다. 그가 진짜 승부수를 던진 이닝은 사상 최고의 역전 드라마가 펼쳐진 9회초가 아니라 그 드라마를 지켜내야 했던 9회말이다.
올해의 일본프로야구 MVP인 3번 야마다 데쓰토에 이어 대회 ‘4할타’를 휘두르고 있던 좌타자 쓰쓰고 요시토모가 나섰지만, “왼손타자에 바깥쪽 변화구를 떨어뜨릴 수 있는” 언더핸드 투수 정대현을 믿었다. 이후 동점주자가 나간 2사 1루에서 일본은 통산 300홈런의 강타자 나카무라 다케야를 대타로 냈고, 그는 왼손투수 상대 타율이 더 높았지만 한국이 맞불을 놓은 마지막 카드는 왼손 이현승이었다. “주자를 1루에 묶은 채 장타만 맞지 않으면 한 점차를 지킬 수 있다”는 계산. 한국 벤치가 ‘운명을 걸었던’ 투수 이현승은 나카무라를 내야땅볼로 잡아내면서 4-3의 스코어를 지켰다.
“쓰쓰고가 정대현의 공을 치거나, 이현승이 나카무라에게 맞았다면 (‘국민감독’이 아니라) ‘국민역적’이 됐겠지. 9회초 그런 뒤집기 끝의 리드를 못 지켰다면…….”
10년쯤 전에는 야구를 말하는 데 훨씬 더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그 때는 스스로 야구에 관한한 박사가 다 됐다고 확신했다”는 김 감독은 오히려 지금은 “아직도 한참 더 배울 야구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야구는 평생 새로운 벗”이라고.
기쁨과 영광, 후회와 상처의 역사와 사건들을 묻고 2015년이 저문다. 야구계의 어른이기도 한 김 감독의 2016년 새해 소망은 “더 깨끗하고 투명한 야구판”이다.
“사회가 이제 많이 맑아졌다. 구석구석 잘 보이고, 더러운 곳은 잘 들킨다. 이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버려야한다. 지도자라면 그저 남들도 그런다거나 상황이 그렇다고 회피해선 안 되고, 늘 소신 있는 리더가 돼야한다. 예전보다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누리는 스타 선수들은 그만큼 팬들과 야구판에 더 무거운 의무가 있음도 알아야 한다. 야구에 몸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상식적인 야구계를 만들어야 할 책임을 나눠 갖고 있다.”
‘프리미어12’ 우승 직후 한국 대표팀이 도쿄돔 현장에서 나눠입었던 챔피언 티셔츠와 캡은 우리가 준비했던 것이 아니다. 일본 대표팀 유니폼 협찬사인 미즈노가 제작한 이 티셔츠는 일본 국대 유니폼 배색과 유사한 다크 네이비 바탕에 골드 프린트를 담고 있었다. 사진=김영구 기자
김 감독은 ‘프리미어12’에서 돌아온 이후 보름 넘게 독감을 앓았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각종 시상식에 나서고 수많은 인터뷰를 했다. ‘대풍작’을 맞은 상복 속에서 “12월 한 달 동안은 앵무새 같았다”고 웃지만, 수십 번을 되풀이해도 ‘프리미어12’ 얘기는 질리지 않는 눈치다. 그만큼 감사하고 행복했던 기억이다.그가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2001년에 태어난 손자는 할아버지가 치러낸 두 번의 WBC 대회 때 너무 어렸다. ‘국대 감독’ 조부의 무용담을 글로만 보다가 이번 ‘프리미어12’는 신나게 지켜봤던 모양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할머니한테 그랬다더라”며 노 감독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뿌듯해한다. 그런 말은 직접 해주면 좋을 텐데 열다섯 살 소년의 무뚝뚝함이 못내 야속하지만.
야구를 하는 보람, 과연 작지 않다.
[chicleo@mae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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