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전문기자] ‘신고선수 출신’ ‘독립구단 출신’에 대한 우리들의 추측, 혹은 오해? 일단 ‘노력형’으로 보인다. 막연히 ‘악바리’일 것도 같다.
LG 내야의 새 얼굴 황목치승(29)의 이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팀 드래프트를 받지 못했고,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를 거친 신고 선수 출신이다. 재능보다 노력, 불굴의 의지에 관한 감동 드라마를 듣고 싶은 스타다.
반전일까. 그는 사실 자신의 의지보다 더 극성스러운 남들의 권유,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준 야구의 길을 걸어왔다. 재능은 타고난 편이다. 언제나 야구를 잘했다. 몸이 멀쩡할 때는.
제주남초등학교 시절 친구 따라 야구를 시작했고, 그의 입학에 때맞춰 창단한 제주제일중을 3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거뜬히 청소년대표가 돼 국제대회 전승 우승도 해봤다. 제주로 친선경기를 왔던 교토국제고 감독의 눈에 띄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스카우트 된 거죠. 고등학교 때도 잘했구요.”
명문 아세아대학에도 순조롭게 진학했으나, 전지훈련 중 연습경기서 더블플레이를 위해 2루로 들어가다가 과격한 주자의 날라차기 같은 슬라이딩에 왼쪽 무릎을 찍혔다. 대학 2년을 통째로 날리게 했던 두 번의 수술 이후 그의 야구 인생은 ‘탄탄대로’와는 다른 트랙을 타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일본 사회인야구팀 세가사미에서 4년을 뛰었지만, 왼 발목 인대 부상과 수술로 고생하면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던 황목치승은 2011년 군 입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다.
“발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더 이상 안되겠구나 생각했죠. 이제 군대 갔다 와서 다른 인생을 준비하려고...”
그러니까 귀국 비행기를 탔던 순간, 그는 이미 야구를 포기했었다. 세 번이나 칼을 댔던 왼쪽 다리로 면제 판정을 받게 되면서 입대도 ‘강제포기’ 당하지 않았다면, 황목치승의 야구 인생은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다.
“군대를 못 가게 되니까 갑자기 2년 동안 ‘하려고 했던 일’이 없어졌죠. 아버지가 운영하던 당구장 일을 도와드리면서 시간을 보내게 됐어요.”
그때 그의 인생에 발동된 ‘지인 찬스’. 2012생활체육 국제야구대회를 준비하던 제주 삼다수 팀이 시간 많아 보이는 ‘선출(선수출신)’ 황목치승을 ‘동네 형들’ 인맥으로 부랴부랴 영입했고, 미국 일본 대만 등 6개국 7개팀이 참가했던 그 대회에서 삼다수는 우승을 했다.
“우승까지 하니까 다시 야구하는 재미를 느꼈죠. 주변에서 또 그만두기 아깝다고 계속하라고 권하고...”
생활체육팀에서 의욕을 되살린 전직 야구선수, 현직 ‘당구장 알바’는 2012년 가을 테스트를 받고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다. 발목 통증에 확신은 없던 시절, 그러나 원더스에서 뛴 1년 동안 황목치승은 야구를 포기하게 했던 발목의 아픔을 극복하게 됐다.
다른 팀도 아닌 LG에서 그를 뽑아간 것은 그의 야구 인생에 또 한번의 선물 같은 우연이다.
“열살 때 94년 LG를 정말 좋아했어요.”
‘신바람의 전설’ 김재현-유지현-서용빈의 신인 3인방이 ‘무적LG’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해다. 서울까지 LG의 잠실경기를 보러 온 적이 있을 만큼 제주 소년의 팬심을 간직하고 있던 황목치승은 “내게 전혀 선택권이 없는 프로 입단 기회였는데도, LG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 기적 같다”고 감격한다. 그의 ‘아이돌’ 유지현은 이제 꿈속에서 툭 튀어나와 그에게 말도 건네고, 칭찬도 해주는 현실의 ‘코치님’이다
서울에서 산지는 고작 1년 반. 황목치승은 고향 제주에서 15년, 일본에서 11년을 살았다. 한국말을 더 잘 할까, 일본말을 더 잘 할까.
“둘 다 애매할까봐 걱정입니다..”
쾌활한 성격에 개그 욕심이 많아서 스스로의 말솜씨가 성에 안찰 뿐이다. 그는 한국말도, 일본말도 썩 잘한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약간 딱딱한 표정인 것은 아직 적응이 덜 돼서. 입이 풀리면 꽤 말을 많이 할 듯한 선수다.
LG 구리 챔피언스클럽의 선수 숙소에서 생활하는 황목치승은 현재 딱히 취미가 없다. 틈만 나면 야구생각뿐일 만큼 몰두하고 있다. 야구선수 황목치승을 한결같이 믿어줬던 제주 집의 부모님과 누나는 아직 그가 1군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서 한번 서울 나들이를 오셔야겠다.
“요즘 하루하루가 정말 즐겁습니다.”
원더스→LG 2군→1군 데뷔까지 주변의 많은 응원과 적잖은 행운이 있었다. 꿈이 이루어진 지금, 황목치승은 비로소 가장 열정적으로 야구를 향한 의지를 불태운다. 원더스 때에 비하면 확실히 ‘시키는’ 훈련량은 줄었지만, 스스로 집중하는 훈련 강도는 세졌다. 앞으로의 야구 인생은 자신의 노력만이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이쯤에서 떠올리는 ‘엽기적인 그녀’ 속 좋은 남자 견우의 마지막 대사.
’우연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다.’
세 번의 수술과 한번의 좌절을 견뎌내고 오늘의 그라운드를 뛰고 있는 황목치승. 제주제일중의 창단, 교토국제고의 스카우트, 삼다수의 러브콜, 원더스가 준 기회, LG가 보여준 꿈까지, 그의 드라마를 만들어 온 우연 같은 인연들은 운명이 그의 의지에게 놓아준 다리였을까.
[chicleo@maekyung.com]
LG 내야의 새 얼굴 황목치승(29)의 이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로팀 드래프트를 받지 못했고,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를 거친 신고 선수 출신이다. 재능보다 노력, 불굴의 의지에 관한 감동 드라마를 듣고 싶은 스타다.
반전일까. 그는 사실 자신의 의지보다 더 극성스러운 남들의 권유,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준 야구의 길을 걸어왔다. 재능은 타고난 편이다. 언제나 야구를 잘했다. 몸이 멀쩡할 때는.
제주남초등학교 시절 친구 따라 야구를 시작했고, 그의 입학에 때맞춰 창단한 제주제일중을 3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거뜬히 청소년대표가 돼 국제대회 전승 우승도 해봤다. 제주로 친선경기를 왔던 교토국제고 감독의 눈에 띄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스카우트 된 거죠. 고등학교 때도 잘했구요.”
명문 아세아대학에도 순조롭게 진학했으나, 전지훈련 중 연습경기서 더블플레이를 위해 2루로 들어가다가 과격한 주자의 날라차기 같은 슬라이딩에 왼쪽 무릎을 찍혔다. 대학 2년을 통째로 날리게 했던 두 번의 수술 이후 그의 야구 인생은 ‘탄탄대로’와는 다른 트랙을 타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일본 사회인야구팀 세가사미에서 4년을 뛰었지만, 왼 발목 인대 부상과 수술로 고생하면서 큰 활약을 하지 못했던 황목치승은 2011년 군 입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다.
“발목이 너무 아팠습니다. 더 이상 안되겠구나 생각했죠. 이제 군대 갔다 와서 다른 인생을 준비하려고...”
그러니까 귀국 비행기를 탔던 순간, 그는 이미 야구를 포기했었다. 세 번이나 칼을 댔던 왼쪽 다리로 면제 판정을 받게 되면서 입대도 ‘강제포기’ 당하지 않았다면, 황목치승의 야구 인생은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다.
“군대를 못 가게 되니까 갑자기 2년 동안 ‘하려고 했던 일’이 없어졌죠. 아버지가 운영하던 당구장 일을 도와드리면서 시간을 보내게 됐어요.”
그때 그의 인생에 발동된 ‘지인 찬스’. 2012생활체육 국제야구대회를 준비하던 제주 삼다수 팀이 시간 많아 보이는 ‘선출(선수출신)’ 황목치승을 ‘동네 형들’ 인맥으로 부랴부랴 영입했고, 미국 일본 대만 등 6개국 7개팀이 참가했던 그 대회에서 삼다수는 우승을 했다.
“우승까지 하니까 다시 야구하는 재미를 느꼈죠. 주변에서 또 그만두기 아깝다고 계속하라고 권하고...”
생활체육팀에서 의욕을 되살린 전직 야구선수, 현직 ‘당구장 알바’는 2012년 가을 테스트를 받고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다. 발목 통증에 확신은 없던 시절, 그러나 원더스에서 뛴 1년 동안 황목치승은 야구를 포기하게 했던 발목의 아픔을 극복하게 됐다.
다른 팀도 아닌 LG에서 그를 뽑아간 것은 그의 야구 인생에 또 한번의 선물 같은 우연이다.
“열살 때 94년 LG를 정말 좋아했어요.”
‘신바람의 전설’ 김재현-유지현-서용빈의 신인 3인방이 ‘무적LG’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해다. 서울까지 LG의 잠실경기를 보러 온 적이 있을 만큼 제주 소년의 팬심을 간직하고 있던 황목치승은 “내게 전혀 선택권이 없는 프로 입단 기회였는데도, LG 유니폼을 입게 된 것이 기적 같다”고 감격한다. 그의 ‘아이돌’ 유지현은 이제 꿈속에서 툭 튀어나와 그에게 말도 건네고, 칭찬도 해주는 현실의 ‘코치님’이다
제주 출신인 황목치승은 제주도내 첫 중학교 야구부인 제주제일중 창단 멤버다. 고교와 대학은 일본에서 다녔다. 프로팀에 학연 선후배가 전무한 그에게 제주도가 고향인 롯데 강민호는 귀한 ‘동향’ 선수다. 사진(잠실)=김재현 기자
서울에서 산지는 고작 1년 반. 황목치승은 고향 제주에서 15년, 일본에서 11년을 살았다. 한국말을 더 잘 할까, 일본말을 더 잘 할까.
“둘 다 애매할까봐 걱정입니다..”
쾌활한 성격에 개그 욕심이 많아서 스스로의 말솜씨가 성에 안찰 뿐이다. 그는 한국말도, 일본말도 썩 잘한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약간 딱딱한 표정인 것은 아직 적응이 덜 돼서. 입이 풀리면 꽤 말을 많이 할 듯한 선수다.
LG 구리 챔피언스클럽의 선수 숙소에서 생활하는 황목치승은 현재 딱히 취미가 없다. 틈만 나면 야구생각뿐일 만큼 몰두하고 있다. 야구선수 황목치승을 한결같이 믿어줬던 제주 집의 부모님과 누나는 아직 그가 1군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서 한번 서울 나들이를 오셔야겠다.
“요즘 하루하루가 정말 즐겁습니다.”
원더스→LG 2군→1군 데뷔까지 주변의 많은 응원과 적잖은 행운이 있었다. 꿈이 이루어진 지금, 황목치승은 비로소 가장 열정적으로 야구를 향한 의지를 불태운다. 원더스 때에 비하면 확실히 ‘시키는’ 훈련량은 줄었지만, 스스로 집중하는 훈련 강도는 세졌다. 앞으로의 야구 인생은 자신의 노력만이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이쯤에서 떠올리는 ‘엽기적인 그녀’ 속 좋은 남자 견우의 마지막 대사.
’우연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다.’
세 번의 수술과 한번의 좌절을 견뎌내고 오늘의 그라운드를 뛰고 있는 황목치승. 제주제일중의 창단, 교토국제고의 스카우트, 삼다수의 러브콜, 원더스가 준 기회, LG가 보여준 꿈까지, 그의 드라마를 만들어 온 우연 같은 인연들은 운명이 그의 의지에게 놓아준 다리였을까.
[chicleo@mae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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