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임성윤 기자] "내가 본 야구선수 중 가장 재능이 뛰어 났던 선수."(백인천)
양준혁, 대졸, 군 제대 후 프로 입단, 그럼에도 19년간 꾸준한 활약으로 신(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양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현역 시절에는 끊임없는 전력질주로 야구사(史)에 큰 획을 그었고 8개 공격부분에서 최고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이후에는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그려가는 인물. 한편으론 재단을 설립해 아마추어 야구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는 영원한 야구인이다.
1998년 27개의 홈런을 기록한 양준혁이 꽃다발을 받고 있다. 1998년 당시 양준혁은 타율 3할4푼2리, 안타 156개, 2루타 30개로 각 부분 1위에 올랐고, 출루율 역시 4할5푼을 기록, 최전성기를 보냈다. 왼쪽 정성훈은 LG 정성훈이 아닌 1977년생 투수 정성훈이다.
양준혁은 사촌형 양일환 삼성 2군 투수코치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남도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신설되자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남도초등학교는 신생팀임에도 양준혁이 6학년이던 1981년 소년동아일보가 주최한 회장기쟁탈 전국국민학교(초등학교)야구대회 3위에 올랐다. 양준혁은 마산 성호초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타석에서는 대회 통산 5할8푼3리의 타율로 타격 2위에 올랐다. 장충리틀야구장에서 선수대표로 깃발을 받은 양준혁(아래). 단체 사진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이도 양준혁이다(위).
경운중학교 재학시절까지 양준혁은 투수를 했다. 왼손잡이인데다 공도 빨랐다. 하지만 던질수록 팔꿈치가 아파 타자에 더욱 많은 관심이 쏠렸다. 결국 중학교 3학년때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1983년 경운중학교 입학당시의 양준혁. 앞줄 맨 오른쪽이 양준혁
투타에서 맹활약을 펼치던 양준혁이었기에 경북고를 포함 여러 야구명문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양준혁은 타자 전향을 결심했기에 타자를 시켜준다고 약속한 대구상고로 진학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대구상고는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다. 1학년때부터 4번타자를 차지했고 고교 통산타율도 3학5푼대를 기록했지만 팀은 4강에 2번 오른 것이 전부였다. 왼쪽 두 번째가 양준혁.
고교야구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양준혁은 졸업이후 영남대로 진학했다. 당시는 고등학교에서 곧바로 프로로 전향하는 사례보다 국가대표를 목표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준혁 역시 국가대표를 목표로 했기에 서울지역 명문 대학보다 성기영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 재직하고 있던 영남대를 선택했다.
도성세 대구상고 감독의 적극적인 추천도 있었기에 2학년 때 이미 진학 도장을 찍었지만 정작 양준혁이 영남대에 입학한 1988년에 성기영 감독은 롯데자이언츠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후임으로 도성세 감독이 부임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1988년 대학운동장에서 겨울훈련 중인 양준혁 왼쪽 2번째.
영남대 입학과 동시에 양준혁은 전국대학야구계에 파란을 일으킨다. 혜성과 같은 등장으로 대학 1학년 때인 1988년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5할4푼5리의 타율을 기록, 타격상을 받았고 1학년 통합 타율은 4할4푼1리에 달했다. 1989년에는 대학 추계 리그와 1990년 춘계 대학리그에서는 도루상을 받았다. 사진으로 봐도 믿기지 않지만 양준혁은 대학시절까지 100m를 11초8에 끊는 마른 몸매의 소유자였다. 영남대 1학년 시절 숙소 앞에서 배팅 연습중인 양준혁.
양준혁은 1988년 국가대표로 발택 돼 이듬해인 1989년 미국에서 열린 제2회 한·미 선수권 대회와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최된 제9회 대륙간컵에 출전한다. 처음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1989년의 양준혁이 서울 반도호텔에서 개최된 대표선수 결단식에 참석하고 있다.
국가대표로서 첫 해외 원정경기를 위해 김포공항에서 출국 준비 중인 양준혁. 오른쪽 안경현 SBS 해설위원의 당시 모습도 새롭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야구장에서 현지 팬들과 담소를 나누는 대표팀 선수들. 왼쪽부터 정민태, 구대성, 양준혁, 송구홍. 당시 대한야구협회는 야구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자 메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김충남 연세대 감독을 사령탑으로 박동희, 김동수, 이종범, 조규제, 공필성, 안경현 등 대학야구를 휘어잡던 선수들을 대거 발탁했다.
1991년 영남대를 졸업한 양준혁은 프로 재수를 택한다. 삼성이 1차 지명에서 좌완투수 김태한을 선택한 사이 쌍방울에 2차 지명 됐지만 양준혁은 미리 약속된 삼성과의 협약에 따라 군 입대를 선택한 후 1993년 삼성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 사이 양준혁은 18개월 동안 ‘마지막 방위’로 근무하게 되며 상무 소속으로서도 대통령배 추계 대회 홈런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펼쳤다. 1991년 군사 훈련을 받을 당시의 양준혁, 뒷줄 오른쪽 세 번째.
[사진제공=양준혁]
下편에서 계속…
양준혁, 대졸, 군 제대 후 프로 입단, 그럼에도 19년간 꾸준한 활약으로 신(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양신’이라는 별명을 얻은 인물이다. 현역 시절에는 끊임없는 전력질주로 야구사(史)에 큰 획을 그었고 8개 공격부분에서 최고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이후에는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그려가는 인물. 한편으론 재단을 설립해 아마추어 야구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는 영원한 야구인이다.
1998년 27개의 홈런을 기록한 양준혁이 꽃다발을 받고 있다. 1998년 당시 양준혁은 타율 3할4푼2리, 안타 156개, 2루타 30개로 각 부분 1위에 올랐고, 출루율 역시 4할5푼을 기록, 최전성기를 보냈다. 왼쪽 정성훈은 LG 정성훈이 아닌 1977년생 투수 정성훈이다.
양준혁은 사촌형 양일환 삼성 2군 투수코치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야구를 좋아했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남도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신설되자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남도초등학교는 신생팀임에도 양준혁이 6학년이던 1981년 소년동아일보가 주최한 회장기쟁탈 전국국민학교(초등학교)야구대회 3위에 올랐다. 양준혁은 마산 성호초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타석에서는 대회 통산 5할8푼3리의 타율로 타격 2위에 올랐다. 장충리틀야구장에서 선수대표로 깃발을 받은 양준혁(아래). 단체 사진에서 깃발을 들고 있는 이도 양준혁이다(위).
경운중학교 재학시절까지 양준혁은 투수를 했다. 왼손잡이인데다 공도 빨랐다. 하지만 던질수록 팔꿈치가 아파 타자에 더욱 많은 관심이 쏠렸다. 결국 중학교 3학년때 타자로 전향하게 된다. 1983년 경운중학교 입학당시의 양준혁. 앞줄 맨 오른쪽이 양준혁
투타에서 맹활약을 펼치던 양준혁이었기에 경북고를 포함 여러 야구명문 고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양준혁은 타자 전향을 결심했기에 타자를 시켜준다고 약속한 대구상고로 진학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대구상고는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다. 1학년때부터 4번타자를 차지했고 고교 통산타율도 3학5푼대를 기록했지만 팀은 4강에 2번 오른 것이 전부였다. 왼쪽 두 번째가 양준혁.
고교야구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한 양준혁은 졸업이후 영남대로 진학했다. 당시는 고등학교에서 곧바로 프로로 전향하는 사례보다 국가대표를 목표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준혁 역시 국가대표를 목표로 했기에 서울지역 명문 대학보다 성기영 당시 국가대표 감독이 재직하고 있던 영남대를 선택했다.
도성세 대구상고 감독의 적극적인 추천도 있었기에 2학년 때 이미 진학 도장을 찍었지만 정작 양준혁이 영남대에 입학한 1988년에 성기영 감독은 롯데자이언츠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후임으로 도성세 감독이 부임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1988년 대학운동장에서 겨울훈련 중인 양준혁 왼쪽 2번째.
영남대 입학과 동시에 양준혁은 전국대학야구계에 파란을 일으킨다. 혜성과 같은 등장으로 대학 1학년 때인 1988년 대학 선수권 대회에서 5할4푼5리의 타율을 기록, 타격상을 받았고 1학년 통합 타율은 4할4푼1리에 달했다. 1989년에는 대학 추계 리그와 1990년 춘계 대학리그에서는 도루상을 받았다. 사진으로 봐도 믿기지 않지만 양준혁은 대학시절까지 100m를 11초8에 끊는 마른 몸매의 소유자였다. 영남대 1학년 시절 숙소 앞에서 배팅 연습중인 양준혁.
양준혁은 1988년 국가대표로 발택 돼 이듬해인 1989년 미국에서 열린 제2회 한·미 선수권 대회와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최된 제9회 대륙간컵에 출전한다. 처음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1989년의 양준혁이 서울 반도호텔에서 개최된 대표선수 결단식에 참석하고 있다.
국가대표로서 첫 해외 원정경기를 위해 김포공항에서 출국 준비 중인 양준혁. 오른쪽 안경현 SBS 해설위원의 당시 모습도 새롭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 야구장에서 현지 팬들과 담소를 나누는 대표팀 선수들. 왼쪽부터 정민태, 구대성, 양준혁, 송구홍. 당시 대한야구협회는 야구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자 메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김충남 연세대 감독을 사령탑으로 박동희, 김동수, 이종범, 조규제, 공필성, 안경현 등 대학야구를 휘어잡던 선수들을 대거 발탁했다.
1991년 영남대를 졸업한 양준혁은 프로 재수를 택한다. 삼성이 1차 지명에서 좌완투수 김태한을 선택한 사이 쌍방울에 2차 지명 됐지만 양준혁은 미리 약속된 삼성과의 협약에 따라 군 입대를 선택한 후 1993년 삼성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 사이 양준혁은 18개월 동안 ‘마지막 방위’로 근무하게 되며 상무 소속으로서도 대통령배 추계 대회 홈런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펼쳤다. 1991년 군사 훈련을 받을 당시의 양준혁, 뒷줄 오른쪽 세 번째.
[사진제공=양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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