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임성윤 기자] 백인천 전 감독, 한국야구의 전설? 역사의 산 증인? 단순한 표현의 나열 만으로는 그가 걸어온 야구인생이나 한국 프로야구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기 힘들다. 한국야구사의 중심에 있다가 일본으로 전격 진출, 19시즌 동안 크나큰 족적을 남긴 뒤 국내로 복귀한 인물. 이후 40대 나이에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국내로 복귀해 4할1푼2리라는 넘을 수 없는 타율의 벽을 후세에 남긴 인물이 바로 백인천이기 때문이다. 어느 덧 73세의 노인이 됐지만 야구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열망을 보였고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활기가 가득 차 있었다. 작은 꿈에서 시작된 그의 야구 인생을 사진으로 만나보자.
백인천은 1975년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 전신) 시절 최종타율 3할1푼9리로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당시 닛폰햄 파이터스의 오다 요시토가 3할1푼8리7모로 추격했지만 백인천은 3할1푼9리2모, 단 5모 차이로 일본 야구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프로야구 선수를 동경해 무작정 일본 땅을 밟은지 14년만이었다.
백인천을 만든 사진 한 장
백인천의 야구인생은 한권의 잡지책에서 출발했다. 경동중 재학시절인 1958년, 백인천은 선배들이 돌려보던 야구 잡지를 접했다. 일본에서 발행된 해당 잡지에는 당시 최고의 선수로 분류되던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컬러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모습에 반해 버린 백인천은 “이 사람과 야구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대다수의 선배들과 많은 관계자들이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백인천은 끊임없는 노력을 지속한 결과, 6년 뒤인 1964년 꿈에 그리던 ‘나가시마 시게오’와 한 그라운드에 서게 된다.
경동고의 홈런타자 백인천
경동고 재학 시절의 백인천은 전국적인 명성을 떨칠 만큼 유명세를 탔다. 1960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날린 홈런은 고교생 최초의 홈런으로 기록됐고, 같은 해 내한한 재일동포학생야구단과의 경기에서는 2점 홈런으로 4-2 승리를 견인, 당시 한국 고교팀 중 유일한 승리팀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제일동포팀을 이긴 이날의 홈런은 백인천의 일본 진출을 가능하게 한 기폭제가 됐다. 50년대까지 한국과 일본의 야구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고 대부분의 초청경기는 제일동포팀의 승리로 끝났지만 백인천의 활약을 눈여겨 본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최태환 부단장이 경동고를 일본으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일본서도 폭발한 백인천의 홈런
문교부의 승인보류에도 총리의 재가로 극적으로 성사된 일본원정에서 백인천은 한국산 홈런 타자 본색을 뽐냈다. 일본학생야구연맹과 재일야구협회가 공동으로 초청한 일본 원정은 갑자원 진출 고교 8개 팀과 경기를 치르는 내용이었다. 도쿄, 교토, 도고, 가고시마, 시모노세키, 히메지, 구마모토, 미야자키 등을 돌며 이어진 원정길에서 경동고는 3승3무2패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특히 마지막 경기였던 니치다이상고와의 경기는 백인천이 3점 홈런을 쏘아올리며 9-2로 완승을 거뒀다. 니치다이상고는 도쿄시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고, 백인천의 홈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진구구장에서 두 번째 홈런이었기에 더욱 화제가 됐다.
첫 번째 일본진출 좌절
일본 원정에서 강타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한 백인천은 현지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메이지대학교 시마오카 감독은 메이지대로 진학할 경우 장학금은 물론 체재비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본행은 정부인가도 나오지 않는 불가능 그 자체였다. 결국 일본행을 위해 국내 대학진학도 포기한 백인천은 농협 실업팀으로 진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행의 재도전, 한국 최초 프로선수의 탄생
백인천의 일본 진출은 이듬해에 이뤄져다.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3승3패의 성적으로 준우승을 거두고 귀국하는 도중, 일본에서 머물던 이틀동안 전격적인 계약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직항 비행노선이 없었기에 일본을 거쳐 들어와야 했는데, 백인천은 이 기간 동안 도에이 플라이어스 미즈하라 감독과 만나 가계약을 맺었다.
일본 진출 좌절에 대한 걱정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국가재건최고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주일 대한체육회회장을 만난 백인천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돌하게도 ‘일본에 보내달라’는 요구를 해버린 것. 당시 군사정권이 막 들어선 상황이었기에 공신이던 이주일 회장의 권한은 막강했고 그의 한마디에 백인천의 일본행은 급물살을 탔다. 하지만 300만엔의 계약금 소식이 알려지자, ‘매국노’, ‘돈에 팔려 일본으로 간다’, ‘이토히로부미 같은 놈’ 등의 비난 여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노력 밖에 없었던 야구에 미친 선수
꿈에 그리던 일본 진출에 성공한 백인천이었지만 순탄한 일정을 보내지는 못했다.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플래시 세례에 주눅이 든 백인천은 68명의 많은 선수를 보유한 도에이 구단의 규모에 놀랐고(68번의 배번은 68번째 입단한 선수라는 뜻), 그라운드에 굴러다니는 공에 다시 한번 놀랐다. 당시 한국 야구는 공 몇 개를 돌려쓰던 시절이었다. 굴러다니는 공들이 너무 신기해 하나하나 주워보던 백인천을 보고 당시 도에이 코치는 “그라운드에 공이 돌아다니면 위험해 보여 치우는 것 같다. 기본자세가 된 선수다”라는 의도치 않은 평을 내리기도 했다.
첫 일본 진출 당시 일본 언론은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0개 기사 중 7개는 1년 안에 좌절을 맛보고 귀국행 비행기에 무너질 것을 예상했을 정도다. 그러나 나머지 3개의 기사는 3년 정도 지나면 좋은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9살의 백인천은 여기에 희망을 걸었다.
다른 선수보다 3배 더 열심히 하면 1년 안에 적응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군 연습은 오전 10시에서 2시까지 이어지는데,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1시간, 아침 먹고 1시간, 연습이후 숙소에서 1시간 등 따로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음식도 맞지 않았다. 흰밥에 단무지, 달걀, 일본식 김밥, 우메보시 등 만이 제공되는 식사는 양이나 맛 둘다 적응하기 힘들었다. 참치회는 많이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새빨간 회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73kg이던 몸무게가 3개월만에 58kg까지 빠졌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백인천은 훈련에 매진했다.
정신적 버팀목, 장훈과의 인연
제일교포 장훈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일본선수들의 견제는 상당했다. 몸에 맞는 공이 57개나 됐고 관중들의 야유, 선수들끼리의 차별도 심했다. 하지만 백인천은 의례히 있는 텃세라 여겼다. 보호구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맨 몸으로 맞서며 꿋꿋하게 버텼다. 이 때 재일교포 선배였던 장훈이 큰 도움이 됐다. 미처 챙기지 못한 장비를 빌려주기도 하고 희망찬 내일을 함께 꿈꿀 수 있었다. 당시에도 슈퍼스타였던 장훈은 이후에도 경쟁자이자 동료, 그리고 형으로서 백인천에게 많은 힘이 됐다.
[사진제공=백인천]
下편에 계속…
백인천은 1975년 다이헤이요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 전신) 시절 최종타율 3할1푼9리로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당시 닛폰햄 파이터스의 오다 요시토가 3할1푼8리7모로 추격했지만 백인천은 3할1푼9리2모, 단 5모 차이로 일본 야구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프로야구 선수를 동경해 무작정 일본 땅을 밟은지 14년만이었다.
백인천을 만든 사진 한 장
백인천의 야구인생은 한권의 잡지책에서 출발했다. 경동중 재학시절인 1958년, 백인천은 선배들이 돌려보던 야구 잡지를 접했다. 일본에서 발행된 해당 잡지에는 당시 최고의 선수로 분류되던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컬러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 모습에 반해 버린 백인천은 “이 사람과 야구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대다수의 선배들과 많은 관계자들이 ‘말도 안 되는 허황된 소리’라고 치부했지만 백인천은 끊임없는 노력을 지속한 결과, 6년 뒤인 1964년 꿈에 그리던 ‘나가시마 시게오’와 한 그라운드에 서게 된다.
경동고의 홈런타자 백인천
경동고 재학 시절의 백인천은 전국적인 명성을 떨칠 만큼 유명세를 탔다. 1960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날린 홈런은 고교생 최초의 홈런으로 기록됐고, 같은 해 내한한 재일동포학생야구단과의 경기에서는 2점 홈런으로 4-2 승리를 견인, 당시 한국 고교팀 중 유일한 승리팀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제일동포팀을 이긴 이날의 홈런은 백인천의 일본 진출을 가능하게 한 기폭제가 됐다. 50년대까지 한국과 일본의 야구는 상당한 격차가 있었고 대부분의 초청경기는 제일동포팀의 승리로 끝났지만 백인천의 활약을 눈여겨 본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최태환 부단장이 경동고를 일본으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일본서도 폭발한 백인천의 홈런
문교부의 승인보류에도 총리의 재가로 극적으로 성사된 일본원정에서 백인천은 한국산 홈런 타자 본색을 뽐냈다. 일본학생야구연맹과 재일야구협회가 공동으로 초청한 일본 원정은 갑자원 진출 고교 8개 팀과 경기를 치르는 내용이었다. 도쿄, 교토, 도고, 가고시마, 시모노세키, 히메지, 구마모토, 미야자키 등을 돌며 이어진 원정길에서 경동고는 3승3무2패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특히 마지막 경기였던 니치다이상고와의 경기는 백인천이 3점 홈런을 쏘아올리며 9-2로 완승을 거뒀다. 니치다이상고는 도쿄시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고, 백인천의 홈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진구구장에서 두 번째 홈런이었기에 더욱 화제가 됐다.
첫 번째 일본진출 좌절
일본 원정에서 강타자로서의 입지를 구축한 백인천은 현지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메이지대학교 시마오카 감독은 메이지대로 진학할 경우 장학금은 물론 체재비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일본행은 정부인가도 나오지 않는 불가능 그 자체였다. 결국 일본행을 위해 국내 대학진학도 포기한 백인천은 농협 실업팀으로 진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행의 재도전, 한국 최초 프로선수의 탄생
백인천의 일본 진출은 이듬해에 이뤄져다.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3승3패의 성적으로 준우승을 거두고 귀국하는 도중, 일본에서 머물던 이틀동안 전격적인 계약이 이뤄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직항 비행노선이 없었기에 일본을 거쳐 들어와야 했는데, 백인천은 이 기간 동안 도에이 플라이어스 미즈하라 감독과 만나 가계약을 맺었다.
일본 진출 좌절에 대한 걱정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국가재건최고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주일 대한체육회회장을 만난 백인천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돌하게도 ‘일본에 보내달라’는 요구를 해버린 것. 당시 군사정권이 막 들어선 상황이었기에 공신이던 이주일 회장의 권한은 막강했고 그의 한마디에 백인천의 일본행은 급물살을 탔다. 하지만 300만엔의 계약금 소식이 알려지자, ‘매국노’, ‘돈에 팔려 일본으로 간다’, ‘이토히로부미 같은 놈’ 등의 비난 여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노력 밖에 없었던 야구에 미친 선수
꿈에 그리던 일본 진출에 성공한 백인천이었지만 순탄한 일정을 보내지는 못했다. 하네다 공항에서부터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플래시 세례에 주눅이 든 백인천은 68명의 많은 선수를 보유한 도에이 구단의 규모에 놀랐고(68번의 배번은 68번째 입단한 선수라는 뜻), 그라운드에 굴러다니는 공에 다시 한번 놀랐다. 당시 한국 야구는 공 몇 개를 돌려쓰던 시절이었다. 굴러다니는 공들이 너무 신기해 하나하나 주워보던 백인천을 보고 당시 도에이 코치는 “그라운드에 공이 돌아다니면 위험해 보여 치우는 것 같다. 기본자세가 된 선수다”라는 의도치 않은 평을 내리기도 했다.
첫 일본 진출 당시 일본 언론은 대부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0개 기사 중 7개는 1년 안에 좌절을 맛보고 귀국행 비행기에 무너질 것을 예상했을 정도다. 그러나 나머지 3개의 기사는 3년 정도 지나면 좋은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9살의 백인천은 여기에 희망을 걸었다.
다른 선수보다 3배 더 열심히 하면 1년 안에 적응을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군 연습은 오전 10시에서 2시까지 이어지는데,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1시간, 아침 먹고 1시간, 연습이후 숙소에서 1시간 등 따로 개인 훈련에 매진했다. 음식도 맞지 않았다. 흰밥에 단무지, 달걀, 일본식 김밥, 우메보시 등 만이 제공되는 식사는 양이나 맛 둘다 적응하기 힘들었다. 참치회는 많이 나왔지만 한국에서는 구경도 못해본 새빨간 회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73kg이던 몸무게가 3개월만에 58kg까지 빠졌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백인천은 훈련에 매진했다.
정신적 버팀목, 장훈과의 인연
제일교포 장훈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일본선수들의 견제는 상당했다. 몸에 맞는 공이 57개나 됐고 관중들의 야유, 선수들끼리의 차별도 심했다. 하지만 백인천은 의례히 있는 텃세라 여겼다. 보호구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맨 몸으로 맞서며 꿋꿋하게 버텼다. 이 때 재일교포 선배였던 장훈이 큰 도움이 됐다. 미처 챙기지 못한 장비를 빌려주기도 하고 희망찬 내일을 함께 꿈꿀 수 있었다. 당시에도 슈퍼스타였던 장훈은 이후에도 경쟁자이자 동료, 그리고 형으로서 백인천에게 많은 힘이 됐다.
[사진제공=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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