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전 김신조 일당을 막아냈던 고(故) 최규식 경무관의 장남 최민석(60)씨가 "청와대와 북악산 개방 소식에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5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최 씨는 현충일을 앞두고 이달 2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만났습니다.
최 씨의 선친인 최 경무관은 이른바 '1·21 사태' 당시 북한 무장 공비들의 청와대 침입 시도를 막고 순직한 전 종로경찰서장입니다.
당시 최 경무관과 순경으로 근무하던 정종수 경사는 1968년 1월 21일 북악 터널을 넘어 자하문 고개로 진입한 김신조 일당을 검문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쏜 기관총에 숨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와대 뒷산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다가 지난달 10일 청와대 개방과 함께 54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최씨는 "잊히던 사건에 시민들이 관심을 가질 계기가 생겨서 긍정적"이라면서도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겨 과거보다 (정부의) 관심이 끊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고 말했습니다.
손수건을 꺼내 비석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던 최씨는 "내 또래 중에서도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있던데 젊은 사람은 더 모르겠더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회상하며 "아버지가 저렴한 우동으로 식사를 매번 급하게 해결하고 바삐 일하던 분이라 '우동 서장'으로 소문이 났었다"며 "우리 4남매 중 막내가 68년 1월에 태어났는데, 그 애 얼굴을 보고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최씨는 1·21 사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유족으로서 서운했다고 토로하며, 특히 최 경무관이 '총격전', '교전' 끝에 사망했다는 표현은 잘못됐다고 지적햇습니다.
최씨는 "아버지와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이 내게 1·21 사태를 전해주면서 많이 분개했다"며 "당시 경찰에게 지급되던 총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맨몸으로 북한 공비를 막다가 돌아가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최씨는 어떤 과정에서 서울 시내 경찰서 서장이 북한군을 막아설 수밖에 없었는지, 당시 군의 방어막은 왜 무력했는지 등은 밝혀지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만 남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군 작전에 참여했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유족들도 만났었다"며 "작전이 실패한 건 지휘관의 잘못일 뿐 똑같은 희생자들인데, 충혼탑 하나 없어 그 가족분들도 한이 많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도주한 북한 공비를 잡기 위해 1968년 1월 말까지 전개된 군경합동 수색 작전에서 최 경무관과 정 경사 외에도 군인 21명과 민간인 7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들을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경찰은 매년 세 차례 1·21 사태 경찰관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어왔습니다.
[디지털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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