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건수사 지적 숱하게 받은 검찰...최근 가이드라인 만들어
'별건체포'로 경찰 기소...경찰의 만시지탄
'별건체포'로 경찰 기소...경찰의 만시지탄
시험지 절도 사건에 '횡령' 혐의 기소
1992년 1월, 후기대학 입시 시험문제지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대학 입시가 아예 연기됐고,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교육부 장관이 바뀌었고, 시험 문제 출제위원들은 다시 시험 문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국민들 역시 수사 상황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시험지가 보관되고 있던 대학의 경비원 A씨가 범인으로 지목됐습니다. 하지만 A씨의 진술은 오락가락했습니다. 그 와중에 공범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사람은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결국 검찰은 진범을 밝혀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A씨는 기소가 됐습니다. 혐의는 횡령이었습니다. 검찰은 3년 전 A씨가 저지른 횡령 혐의로 A씨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일단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나중에 시험지 절도의 전말을 밝혀내겠다는게 당시 검찰의 계획이었지만, 전말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영구미제로 남게 됩니다.
1990년대 초반은 저렇게 검찰이 공공연하게 '별건수사'를 천명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요?
촘촘한 별건수사 가이드라인 만든 검찰
검찰의 실천 여부는 논외로 하더라도 상당히 촘촘한 별건수사 가이드라인이 마련됐습니다. 우선 법무부가 2019년 법무부령으로 인권보호수사규칙을 만들었습니다. 15조엔 "검사는 수사 중인 사건의 범죄 혐의를 밝히기 위한 목적만으로 관련 없는 사건을 수사하는 방식으로 부당하게 피의자를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나옵니다.
대검찰청 역시 2021년부터 별건수사에 대한 지침을 제정했습니다. 대검 예규 <<검찰 직접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별건범죄 수사단서의 처리에 관한 지침>>입니다. 아래는 주요내용입니다.
"별건범죄에 대해 수사 또는 조사를 직접 개시하고자 하는 검사는 별지 ‘별건범죄 수사단서 검토서’를 작성하여 소속청(지청을 포함한다) 인권보호관(차장검사를 두지 않은 지청은 인권보호담당관)의 검토를 거친 후, 검사장의 승인을 받아 대검찰청(반부패강력부, 형사부, 공공수사부)에 미리 보고해야 한다."
별건수사를 아예 없앨 수는 없습니다. 절도죄로 조사를 하다 살인 정황이 드러났는데 살인 혐의에 대해 수사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인신 구속을 무기로 피의자를 압박하는 수사 기법으로서의 별건수사는 분명 인권침해입니다. 별건수사는 제한적으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이런 가이드라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영장은 주거침입...수사는 마약
경찰은 어떨까요? 지난해 별건수사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주거침입 혐의로 신청해서 발부받은 체포영장을 마약 범죄 수사에 사용했습니다. ([단독] 검찰, '외국인 불법 감금' 수사한 경찰 기소 / https://www.mbn.co.kr/news/society/4719146)
마약 수사를 받은 사람은 외국인이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의 권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이 외국인을 9시간 동안 붙잡아 조사하면서 소변과 모발까지 채취해 마약 성분 분석을 했습니다. 나중에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이 같은 과정을 불법감금에 해당한다고 보고 담당 경찰관을 지난달 직권남용감금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마약 수사를 받던 외국인은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나 강제 출국됐습니다. 만약 강제출국 되지 않고 재판에 넘겨졌더라도 마약 성분 분석 결과는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 동안 경찰을 둘러싸고 별건수사 논란이 크게 불거진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별건수사 논란은 주로 구속영장 청구권을 쥐고 있는 검찰이 타깃이 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경찰도 시나브로 별건수사의 위험에 무감각해졌을 수 있습니다.
경찰의 별건체포는 앞으로 얼마든지 다시 발생할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경찰이 입법예고한 인권보호 규칙을 살펴보면 별건수사에 대한 방지 조항이 있습니다. 제12조 3항에 "경찰관은 수사 등 진행 중인 사건의 범죄 혐의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관련없는 사건의 수사 등을 개시해서는 안된다"고 나옵니다. (경찰 수사에 관한 인권보호 규칙 제정안 입법예고 / https://opinion.lawmaking.go.kr/gcom/ogLmPp/67412) 이 입법예고안은 올해 2월에 발표됐습니다. 지금은 국민의견 수렴 단계입니다. 인권보호 규칙이 조금 더 빨리 마련됐더라면 별건체포, 별건수사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인권은 단순히 경찰이 지켜야 할 기준이 아니라 경찰 활동을 통해 구현해야 하는 경찰의 핵심 가치”라고 인권보호 규칙의 제정 의미에 대해 밝힌 바 있습니다. 경찰의 만시지탄이 탄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 이권열 기자 / 2kwo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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