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있다면 미국에는 O. J. 심슨 사건이 있다. 두 사건 모두 수사팀을 무수히 괴롭힌 사건이다.
O. J. 심슨 사건은 미국의 유명 풋볼 선수였던 O. J. 심슨(흑인)이 백인 아내(니콜 심슨)와 아내의 친구(론 골드만)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시작된다. 당시 검찰 측이 배심원단에 제시한 증거들을 보면 일견 O. J. 심슨의 혐의는 명백해 보인다. 증거는 아래와 같다.
- O.J.심슨의 양말에 묻은 혈액에서 피해자인 니콜 심슨의 DNA가 검출됐다.
- 론 골드만의 셔츠에서 O. J. 심슨의 것과 인종적으로 같은 머리카락이 발견됐다.
- 사건 현장 근처에 떨어진 피가 묻은 왼쪽 장갑에서, O.J.심슨, 니콜 심슨, 론 골드만 세 명 모두의 DNA가 검출됐다.
- O.J.심슨은 왼손잡이다.
- 해당 장갑과 짝이 맞는 오른쪽 장갑이 O.J.심슨의 집에서 발견됐다.
- O.J.심슨이 전처이자 피해자인 니콜 심슨에 대한 상습적 폭행으로 고발된 적이 있었다.
- 사건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발자국의 사이즈가 O. J. 심슨의 발 사이즈와 일치했다.
- 론 골드만의 혈액이 당시 O.J.심슨이 입고 있던 셔츠에서 대량으로 발견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런 증거들을 갖고도 검찰은 O. J. 심슨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다. 가장 핵심적인 증거물이라고 보였던 '피가 묻은 장갑'을 O. J. 심슨이 법정에서 직접 손에 끼려고 했는데, 터무니 없을 정도로 작아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본 검사 측은 '멘붕'했고, 12명 중 흑인이 9명이던 배심원단은 무죄를 평결했다.
사건 이후 여러 곳에서 반론이 나왔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은 피나 물과 같은 액체가 묻었을 때 줄어들기 때문에 손에 맞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포인트다. 그러나 재반론에 따르면 액체가 묻어서 작아지는 정도는 그렇게 크지 않고, 자신이 쓰던 장갑을 손에 제대로 끼우지도 못하는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정말 범인은 누구인가? 당시 사건을 재수사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던 헨리 리 박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범인은 O. J. 심슨의 아들인 제이슨 심슨(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위에 논란이 됐던 '피 묻은 장갑'이 사실은 제이슨 심슨에게 니콜 심슨이 준 선물이었고, 현장에서 발견된 운동화자국이나 모자도 모두 제이슨 심슨의 것으로 나중에 확인됐다. 게다가 O. J. 심슨의 전처 소생인 제이슨 심슨과 니콜 심슨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O. J. 심슨과 관련해 제시된 증거들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O. J. 심슨은 자신의 아들을 말리려고 했다가 피가 난 것이고, O. J. 심슨의 아들이니 당연히 장갑 한쪽이 O. J. 심슨의 집에 있는 것이며, O. J. 심슨도 같은 장소에 있어서 발자국이 난 것이고, 아버지에게 유전된 머리카락은 심슨의 아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범행 동기도 제시됐다. 제이슨 심슨은 사건 당일 자신이 일하는 레스토랑에 유명인인 아버지가 와주기로 했는데, 니콜이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시키는 바람에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다. 헨리 리 박사는 제이슨이 격분한 채 칼을 들고 말았고, 이를 안 O. J. 심슨이 달려가 말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손을 다쳐 피를 흘린 채 비행기 시간 때문에 서둘러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했다. 무엇보다 O. J. 심슨이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이를 지목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 범인이 다름아닌 자기 아들이기 때문이다.
O. J. 심슨 사건을 다룬 영화의 포스터
위의 이야기는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의 <한국의 CSI> (북라이프)라는 책에서 소개되어 있는 내용이다.미국 최고의 과학수사 전문가 헨리 리 박사가 'CSI KOREA 2020 국제콘퍼런스' 행사에 22일 참석했다. '2020 과학수사의 새로운 기술'을 주제로 한 기조발제에서 헨리 리 박사는 "증거중심의 형사사법 환경 변화는 전 세계적 추세로 과학수사는 앞으로도 중요성이 커질것"이라며 "과학수사가 첨단기술과의 융합도 중요하지만 공개적인 검증을 통해 과학수사로 억울한 피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그가 직접 경험한 O. J. 심슨 사건을 반영한 강조점으로 해석된다. O. J. 심슨 사건에 대한 법정공방에서 검찰에 의해 제출된 증거물의 증거능력에 관해 큰 논란이 있었고 이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헨리 리 박사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 이후 DNA 대조를 위해 채취한 O. J. 심슨의 혈액 중 9/10에 해당하는 150mg이 사라지면서 사건 조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변호인들은 주장했다. 경찰들은 이 혈액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 답변하지 못했다.
또 감식반이 사건 발생후 초기 현장에서 경찰들이 맨손으로 범행현장을 체크하고 증거물을 수집하기도 했다. 일부 증거는 사건현장에 처음 도착한 형사들이 확보한 다음 집에 가지고 갔다가 경찰서에 제출했다고 한다. 게다가 결정적 증거라고 제시된 피묻은 가죽장갑은 사건현장 첫 수색때 안나오고 나중에야 찾았는데, 검찰측, 그리고 사건현장을 조사한 경찰측은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사건 초기 현장에 도착했을 때 세심한 증거물 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사례다.
O. J. 심슨 사건은 아직까지도 진범이 밝혀지지 않았다. O. J. 심슨 본인과 어쩌면 그의 아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최소한 경찰의 초기 증거확보 과정에서의 미숙함, 배심원이 유무죄를 가리는 미국의 형사법 제도 등이 모두 영향을 미친 결과 거의 영구적으로 미제사건으로 남게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최희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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