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땅만 보고 다니니?"
친구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영준 씨(29)는 오늘도 맨홀 뚜껑을 찾아 나선다. 일제강점기 당시 만들어진 맨홀 뚜껑을 발굴하는 게 그의 취미 중 하나다. 숱한 사람들이 발을 내디딘 맨홀 뚜껑에 도시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게 김씨 얘기다.
김씨는 지난 4월 29일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경성부 맨홀 지도'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는 1910~1950년대 경성부(지금의 서울시) 휘장이 새겨진 맨홀을 찾아 그 소재지를 구글 지도에 표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파악한 곳만 열네 곳에 달한다.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장 깨기'를 하는 기분이란다. 신설동, 청량리, 서대문, 용산, 광화문, 영등포까지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상 경성부에 속했던 곳에는 당시 맨홀 뚜껑이 남아 있다.
김씨의 '맨홀 뚜껑 탐사'는 지난 2017년부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포털사이트에서 '로드뷰' 기능을 이용하다가 우연히 서울 용산구 삼각지의 한 도로에서 '소방수조'(消防水槽)라는 글자와 경성부 휘장이 새겨진 철제 덮개를 포착했다. 깜짝 놀란 김씨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김씨의 발견은 그해 겨울 한 언론에 보도됐고, 소식을 접한 관할 소방서가 문화재 보존 작업에 나서는 결과로 이어졌다.
◆ "70년대 팸플릿 속 서울은 세계 최대 여대가 있는 도시"
① 1969년 착공해 4년 뒤인 1973년 개업한 프레지던트 호텔(백남빌딩). ②노스웨스트항공이 1970년대 펴낸 서울 여행안내 팸플릿(왼쪽)과 캐세이퍼시픽 항공의 1970년대 서울여행 가이드북.[사진 출처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페이스북 페이지]
김씨는 지난 2015년부터 트위터·인스타그램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해시태그 '서울의현대를찾아서'라는 이름을 단 게시물을 120여건 올렸다. 올해 4월부터는 페이스북에 동명의 페이지를 열었다. 서울 시내 근·현대 건축물을 촬영한 사진과 그에 얽힌 역사적 에피소드, 비평 콘텐츠들로 구성돼 있다.예를들면 서울시청 인근에 자리 잡은 프레지던트 호텔(백남빌딩)에 대해 김씨는 "시대의 빈틈이 낳은 괴작"이라며 "이 호텔이 착공된 1969년에는 지금과 같은 용적률과 건폐율 규정이 없었고, 지금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1950%'라는 천문학적 용적률을 확보한 채 지어진 비화가 있다"고 서술했다.
지금은 델타항공에 합병된 미국 노스웨스트항공과 홍콩 캐세이퍼시픽항공이 각각 1970년대 펴낸 서울 여행안내 팸플릿 사진도 이채롭다. 김포공항 여객청사와 워커힐 리조트 등이 컬러 사진으로 수록된 팸플릿은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천문대를 세운 나라"라고 치켜세우고 수도 서울을 가리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여자대학교가 있는 도시"로 묘사한다.
1991년생 김씨 또래의 청년들은 그가 올리는 콘텐츠에 관심을 드러낸다. "이런 곳에 귀중한 유산이 남아 있었다니" 등 신기하다는 반응이 많다. 1930년대 지어진 중구 북창동 벽돌 창고 사진을 찍어 올렸더니 누군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 '항상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을 줄 알았다'며 '나라면 길거리에서 지나치고 못 봤을 텐데, 당신 덕분에 역사적 건물을 알게 됐다'고 호평했다.
◆ "故 손정목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가 나를 이끌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의 한 카페에서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SNS를 운영하는 김영준 씨가 자신이 펴낸 사진집 '서울의 정말 오래된 빌딩들'을 손에 든 채로 서 있다. [사진 출처 = 박동우 인턴기자]
김씨가 본격적으로 서울의 도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중학생이던 2006년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가 펴낸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읽었다."교과서에서 접하던 정갈하게 기술된 역사가 아닌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접할 수 있었어요. 시청 인근 플라자호텔 터가 과거엔 화교들이 살던 땅이었다는 이야기부터 구자춘 전 서울시장이 30분 만에 서울 지하철 2호선 노선도를 그렸다는 일화까지 흥미진진하더군요." 도시계획에 매혹된 김씨는 연세대 도시공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생 시절 김씨는 한가한 시간을 활용해 오래된 빌딩으로 답사를 나갔다. 그는 "버스를 타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길거리를 거닐다 보면 '앗!'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건물이 보이면 나중에 그곳으로 찾아간다"며 "국토교통부 건축물 생애이력 관리 시스템에서 해당 건축물의 주소를 조회하고 서울역사박물관 또는 국가기록원의 아카이브를 검색해 자세한 정보를 수집한다"고 말했다.
답사 과정에서 겪은 사연도 다양하다.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맞닥뜨린 관리인이 자신을 겨냥해 "부동산 업자 아니냐"고 의심하는 바람에 쫓겨난 경험도 부지기수다. 관리인은 내부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는데, 건물에 거주하는 노인이 "마음 놓고 찍으라"고 당부하는 통에 누구 장단에 맞춰야 할지 난처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현행 건축법 제정 이전에 지어진 건물 계단을 오르다 성인 남성의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난간을 보곤 눈앞이 아찔했던 기억도 있단다.
◆ "공간 추억 공유하며 분절된 '서울 사람' 삶을 이어줘"
① 1933년 서울 중구 남산 자락에 건립된 대한적십자사 별관(옛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건물). ② 1934년 서울 중구 남대문로3가에 세워진 삼영빌딩(옛 아지노모토 경성지점). [사진 출처 = 김영준씨 사진집 '서울의 정말 오래된 빌딩들']
김씨는 지난해 10월 사진집 '서울의 정말 오래된 빌딩들'을 출간했다. 지어진 지 50년 넘은 건물 일곱 곳을 찾아가 찍은 사진을 싣고 외관 디자인에 관한 설명을 기술했다. 이를테면, 서울 중구 남산 자락에 있는 대한적십자사 별관은 1933년에 지어졌다.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쓰인 이 건물에 대해 김씨는 "세로로 긴 창문이 2층에 나 있는 점, 1층 현관 출입구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부분 등은 1933년의 모습과 비교해 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용도와 원형을 유지한 채 시대 변화에 맞춰 '진화'를 거듭해 나간 참으로 대견한 빌딩"이라고 평가했다.그는 일제강점기 세워진 빌딩의 특징으로 외벽에 다닥다닥 붙은 타일, 세로가 긴 직사각형 모양의 사분할 창문을 꼽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4년 건립된 중구 남대문로3가 삼영빌딩이다. 그곳은 일본 조미료 기업 아지노모토 경성지점이 입주했던 건물이다.
김씨가 근·현대 건축물을 찾아다니고 이를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서울 사람들이 함께 사는 이웃이라는 동류의식을 느끼고 느슨하게나마 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 때문이다.
"현재 30대 후반 이상의 나이를 먹은 서울 사람 중에 명동 미도파 백화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20대 초반으로 내려오면 '미도파'는 몰라도 '롯데 영플라자'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같은 서울을 살아가지만 공간에 대한 인지와 추억이 이렇게나 다릅니다. 내가 길을 걸을 때 마주친 빌딩이 실은 60년이 된 건물이라는 것을, 그곳이 옛날에는 어떤 공간이었는지, 그러한 인지와 추억을 공유할 장을 열어준다면 분절된 서울 사람 개개인의 삶을 이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 "한국의 '뉴욕시티 어버니즘'으로 키우고파"
① 김영준 씨가 운영하는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페이스북 페이지 화면. ② '뉴욕시티 어버니즘'(NYC Urbanism) 홈페이지 화면. 19세기 뉴욕 건축물부터 지하철 노선 변천사, 지역별 이민자 커뮤니티 특징, 도심 재개발 등 뉴욕의 도시 역사 전반을 다룬다. [사진 출처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페이스북 페이지·'...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SNS 페이지를 "장기적으로 '뉴욕시티 어버니즘'(NYC Urbanism) 같은 페이지로 키우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뉴욕시티 어버니즘은 뉴욕시 도시계획 관련 굿즈를 파는 동명의 온라인 쇼핑몰에서 운영하는 SNS 채널"이라며 "19세기 뉴욕 건축물부터 지하철 노선 변천사, 지역별 이민자 커뮤니티 특징, 도심 재개발 등 뉴욕의 도시 역사 전반을 다룬다"고 설명했다.급변하는 서울의 과거를 길어 올려 하나하나 소개하는 김씨의 목소리에선 진지함이 묻어났고 자신감 넘쳐 보였다. 서울의 어제는 이미 우리 삶 속에 스며들었다.
[디지털뉴스국 박동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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