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소재 A척추전문병원에서 척추 골융합수술 일정을 잡았던 최모(72)씨는 최근 병원으로부터 갑작스레 수술연기 통보를 받았다. 수술을 코앞에 앞두고 병원 측이 “수술시 필요한 혈액을 스스로 확보해 달라”고 전해왔기 때문이다. 병원에 재고혈액이 바닥나 다량의 혈액이 필요한 수술은 진행할 수가 없다는 거였다. 최씨는 급히 주변을 수소문해 A형 혈액형을 지닌 2명을 동원해야 했고, 결국 예정보다 2주가 지나서야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병원에는 10월 초 현재 병원의 혈액 부족으로 수술을 미룬 환자가 여러명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최근에는 의사와 간호사, 병원 직원들이 나서서 환자들을 위해 헌혈까지 하고 있다.
재고 혈액 감소로 인해 환자 수술을 차일피일 미뤄야 하는 병원들이 잇따라 나타나고 있다. A병원의 한 관계자는 “모든 수술이 아무리 급해도 2주씩은 미뤄지는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병원들의 재고혈액 부족은 ‘헌혈량 부족‘에 기인한다. 국내 혈액보유일수(적혈구제제 기준)는 2014년 연평균 6.5일분에서 2015년 5.3일분로 하락하더니 올해는 평균 4.2일분을 기록하고 있다. 추가 수혈이 없이는 4.2일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수치는 대한적십자가가 정한 정적 보유량(5일분)을 하회하는 수준이다. 심지어 지난 9월말에는 한때 O형 적혈구제제 보유분이 1.8일분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2일분 미만은 경계, 3일분 미만은 주의단계다.
헌혈량 저하는 고령화사회가 되면서 30대 이하 헌혈인구가 줄어든 탓이 크다. 조덕 삼성서울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주 현혈층인 30대 이하 인구층이 줄어들고 단체 헌혈도 줄어든 게 혈액수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연간 헌혈자수(1~9월)를 확인해본 결과 30세 이하 헌혈자 비중은 올해 72.4%로 2010년 79.1%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당장 지난해와 비교해도 30세 이하 헌혈자수는 175만7057만 명에서 152만5437명으로 20만 명 이상 줄어들었다.
대한적십자사는 지속적으로 국민들의 헌혈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있으나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실제 매일경제가 강남 현혈의 집 앞에서 매일 진행되고 있는 헌혈 독려 캠페인에 참여해본 결과 헌혈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두시간여 동안 행인들을 대상으로 참여를 독려했으나 이에 응해준 시민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곁눈질로 힐끗 보더니 행여나 붙잡기라도 할까 방향을 트는 시민들만 종종 눈에 띄었다.
이들이 헌혈을 마다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행인들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밥을 못 먹어서 못한다”, “감기에 걸려 몸이 안 좋다”, “약을 먹고 있다” 등 다양한 사유로 정중히 헌혈 제안을 거절했다.
“헌혈 해봤자 적십자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아닌가” 또는 “헌혈이 건강에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등 부정적 선입견도 많았다. 헌혈을 하면 감염, 에이즈 등 각종 질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내용의 글들을 인터넷에서 봤다는 것이다. 헌혈의 집 직원들에 따르면 이같은 인식은 지난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와 지난 8월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으로 C형간염 집단감염 사태가 연이어 터저나오면서 더욱 심해졌다.
전문가들은 “헌혈이 건강에 나쁘다는 것은 괴담”이라고 일축했다. 조덕 삼성서울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는 “채혈백이나 주사기 등을 모두 1회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에이즈 등의 감염 확률은 제로”라며 “헌혈에 대한 각종 소문들은 말 그대로 괴담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적십자가 혈액으로 ‘장사’를 한다는 부정적 인식도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접십사자는 헌혈로 모은 혈액을 병원에 공급할 때 소정의 혈액수가를 받고 있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매아 낮은 수준이다. 현재 혈액수가는 F-RBC(백혈구제거적혈구) 기준 한 팩(유닛)당 7만1980원으로 고정돼 있으며 이는 유닛당 333달러(약 38만원)에 달하는 호주를 비롯해, 네덜란드(273달러), 프랑스(255달러), 미국(223달러), 영국(196달러), 독일(115달러) 등보다 낮은 수준이다.
[연규욱 기자 / 박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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