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A중학교 2학년 김모양은 올해 1학기 수학에서 90점(A등급)을 받고 부모님에게 자랑했다가 예상 외의 반응에 놀랐다. 김 양 어머니는 “주변 친구들도 다 A등급이니 자랑거리가 아니다”라는 핀잔을 준 것이다. 알고보니 수학 시험이 상당수 학생에게 쉬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교생의 절반 가까이가 A등급을 받았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고 있다. 2013년 중학교 내신 절대평가 도입 이후 각 학교에선 이같은 중2 시험 ‘쉽게 내기’ 경쟁에 불이 붙었다.
절대평가는 기존 9등급제로 나뉘는 상대평가(상위 4%만 1등급)와 달리 일정 기준 이상을 넘기면 동일한 등급(90점 이상 A)을 주는 학교 성적 평가 방식이다.
교육부와 시교육청은 쉬운 시험에 대해 “절대평가 취지에 맞는 현상”이라며 이를 묵과하고 있다. 절대평가가 애초 중학생 시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도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의 뒷면에는 외고 등 특목고 입시가 자리잡고 있다.
중2 성적에서 A등급을 받지 못하면 사실상 특목고 입시에서 탈락하기 때문에 일부 학부모들이 학교 측에 ‘시험을 쉽게 내달라’는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6일 매일경제가 서울소재 383개 중학교의 국어·수학·영어 등 주요 과목 내신 성적(2학년 1학기 기준)을 조사한 결과, 이들 과목 모두 최근 3년새 A등급 비율이 크게 올라갔다. 2013학년도 수학 A등급은 평균 19.7%였는데 2015학년도는 24.9%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국어는 19.5%에서 23.2%, 영어도 21.6%에서 25.8%로 상승했다. 수학과 영어의 경우 학생 4명중 1명이 90점을 넘은 것이다.
절대평가 이후 3개년치 A등급 비율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학교들이 시험을 점점 쉽게 낸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올해 시험 성적(2016학년도)은 현재 각 학교별로 취합 중이지만 이같은 ‘성적 퍼주기’는 여전하다고 학교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성적 상위권 학생이 몰린 일부 강남권 학교는 이같은 현상이 더 뚜렷하다.
강남구 대명중학교의 2013학년도 수학 A등급 비율은 20.3%였지만 작년에는 이 비율이 52.8%까지 치솟았다. 서울에서 수학 과목 상승 폭으로 최대다.
같은 지역 수서중학교의 영어 A등급 비율은 3년새 9.5%에서 46.6%까지 올랐다. 서초구 신동중학교는 국어 A등급 비율이 4배(10.3%→42.7%) 가량 증가했다.
강남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대문구 소재 중학교의 수학 A등급 비율은 같은 기간 15%에서 28.3%로 서울 주요 지역 중 가장 많이 올랐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는 “5~6년전과 비교하면 전반적 학생 학력수준은 다소 떨어지고 있는데 A등급 비율이 오르고 있다”며 “시험 난이도 관련 학부모 민원이 크게 증가하면서 시험이 쉬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학교와 학부모가 합작한 ‘달콤한 A등급의 맛’은 중2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현재 중학생은 학년마다 다른 교육 제도로 인해 큰 혼란에 빠져 있다.
1학년은 현장 수업 위주의 ‘자유학기제(시험 면제)’, 2학년은 절대평가, 3학년은 일부 상대평가제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명문대의 지름길로 알려진 외고·국제고는 신입생 선발때, 중2 성적은 절대평가제, 중3은 9단계 상대평가제를 적용한다. 중2 성적은 A등급이 너무 많아 사실상 3학년 성적으로 당락이 좌우되는 구조다. 특히 외고·국제고는 중3 영어 A등급 비율이 4%를 넘어가면 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B등급으로 처리한다.
이에 따라 일부 학교가 중3 영어 시험 난이도를 크게 올리면서 상위권 학생들 조차 점수가 급락하는 ‘성적 절벽’을 경험하고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학생 부담을 줄여주려면 교육 과정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중학생은 매 학년 다른 제도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며 “중3 이후 갑작스런 학업 부담에 오히려 학업 포기자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문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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