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재동 화훼단지에서 만난 남 모씨(71)는 선물용 난에 붙이는 리본 위에 붓글씨를 쓰는 일이 생업이다.
작은 점포에 하루 종일 앉아 축하 문구를 정성들여 쓴다. 남 씨에게는 직장 은퇴 후 지난 15년간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게 해 준 소중한 일자리다. 남 씨에게 김영란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높은 사람들이 돈 봉투 받아먹는 것이나 막아야지...”라며 한숨부터 쉬었다.
남 씨는 “동양난 하나에 열다섯 사람이 먹고 사는 걸 알고 있느냐”며 “난 장사, 돌 장사, 화분 장사, 난 키우는 사람, 붓글씨 쓰는 사람들이 이 일로 힘들게 먹고 산다”고 말했다. 실제로 난 생산농가는 400여 곳에 불과하지만, 관련 업종 종사자 수는 6000명 가까이 될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추산이다. 이들 대부분은 영세 사업자들이거나 비정규직 종업원들이다.
김영란법 시행을 두달여 앞둔 서울 양재동 화훼시장에는 벌써부터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30년째 난 도매 매장을 운영해온 강 모 씨는 “여의도에서 시위까지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80~90% 정도 매출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곧 매장을 내놓을 생각”이라고 체념한 듯 말했다.
양재동 화훼단지에서 H농원을 운영하는 김 모 씨는 “인건비, 화분값, 흙값, 나무값 등 들어가면 5만원 이하로 맞출 재간이 없다”며 “기껏 10만원대 안팎인 난 선물을 막아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라고 하소연했다.
이미 난 경매시장에서는 가격 급등락이 반복되는 등 혼란도 커지고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aT) 화훼공판장에 따르면 올해 1월에 난 1분당 평균가격은 8488원으로 전년 동월대비 52.5% 급등했다. 그러던 것이 가격이 급락하면서 올 4월에는 5063원, 5월에는 4496원으로 추락했다. 전년 대비 각각 -21.9%, -24.7%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6월에는 5171원으로 다시 가격이 오르더니 이달 들어 20일까지 평균가격은 7070원까지 상승했다.
박승동 aT화훼공판장 경매실장은 “경매를 20여년 해왔지만 이런 흐름은 유례가 없다”며 “가격이 급등락하는 것은 화훼산업 기반이 약해진데다 김영란법 시행에 대한 우려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재 화훼단지의 한 상인은 “시장 예측이 불안정하다보니 물량 변동이 심하다”며 “김영란법을 시행하게 되면 아예 난 재배 자체를 포기하는 농가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훼농가들은 김영란법 시행 이전부터 어려움을 겪어왔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09년 8640억원이었던 국내 화훼 생산액은 2014년에는 7019억원으로 19% 줄었다. 화훼 생산농가 수는 2010년 1만347곳에서 2014년에는 8688곳으로 감소했다. 재배면적 또한 같은 기간 6829ha에서 6222ha로 쪼그라들었다.
국내 생산이 위축되면서 수입산 화훼가 빈 자리를 채우고 있다. 2010년 4474만달러 수준이었던 수입산 화훼는 2014년 5721만달러 규모로 증가했다. 4년새 27.9%가 늘어난 셈이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수입산 화훼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권영규 aT센터 부장은 “이미 중국, 베트남, 콜롬비아 등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들로부터 수입 물량이 늘고 있는데,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수입을 더 촉진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상대적으로 다른 농업분야에 비해 화훼농가 타격이 큰 이유는 또 있다. 난을 비롯한 화훼는 다른 농작물에 비해 재배 기간이 긴데다 각종 시설 운영비도 추가로 들어가기 때문에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가 매우 어렵다. 업계 관계자는 “난을 재배하려면 시설비용이 크게 들어가는데다 겨울철 난방비도 상당하다”며 “한번 부도가 나면 영원히 복구가 안되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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