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소유한 저작물이라도 원저작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폐기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국가 소유라도 특정 처분 행위가 작가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면 권리 행사에 신중해야 한다는 기준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27일 미술가 이반 씨(75)가 “경의선 도라산역에 그린 벽화를 작가의 동의 없이 철거한 정부의 조치는 부당하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씨는 1000만원의 배상금을 받게 됐다.
재판부는 국가 소유물이라도 △저작물의 종류와 성격 △설치 장소의 개방성과 공공성의 정도 △국가가 이를 선정해 설치하게 된 경위 △폐기 이유와 폐기 결정에 이른 과정 △폐기 방법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폐기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의뢰해 통일 염원을 상징하는 특별한 의미를 담아 도라산역에 설치하고 관광객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한 벽화를 3년도 지나지 않아 작가에게 통보 없이 원형을 크게 손상시키면서 철거하고 소각한 것은 이 기준에 비추어 객관적 정당성을 결여했다”며 “국가는 이씨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이씨는 2006년 3월 “현실과 통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창작·제공해달라”는 정부의 의뢰를 받고 2007년 1월 14점의 대형 벽화를 도라산역에 설치했다. 그런데 참여정부에서 이명박정부로 바뀐 2010년 5월 정부는 “벽화가 전반적으로 색상이 어둡고 난해하며, 그림 내용을 이해하기 곤란하다”며 “민중화로 ‘무당집’ 분위기를 조성해 공공장소인 도라산역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이씨와 사전 협의 없이 벽화를 소각·철거했다. 이씨는 “저작인격권이 침해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에서는 이씨가 패소했지만 항소심은 이씨 손을 들어주며 “국가가 이씨에게 1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통일부 산하 남북출입사무소 소속 공무원이 벽화를 철거한 후 소각한 행위는 이씨가 예술창작자로서 갖는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인격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로서 객관적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위법한 행위”라고 판시했다.
[김세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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