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 창에 점(.)은 왜 찍은 거죠?”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에 가담한 혐의(사기 등)로 최근 서울 마포경찰서에 구속된 유모(20)씨 등 4명은 검거되고 나서 자신들의 휴대전화를 압수수색하던 수사관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이들이 중국 메신저 ‘위챗’으로 중국 내 총책과 연락을 주고받은 내용을 살펴보던 마포서 수사관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통장 전달책 또는 현금 인출책인 이들이 총책과 대화하다 난데없이 점 하나만 찍은 경우가 숱하게 발견됐기 때문이다.
수사관의 추궁에 유씨 등은 순순히 내막을 털어놨다.
언제 경찰이 따라붙거나 검거될지 모르니 총책은 조직원의 안전을 늘 살펴야 했다. 어느 조직원이 검거됐다면 그가 경찰에 포섭돼 자신들을 유인하는 처지가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암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직명이 ‘쩐의 전쟁’이라는 이 조직은 총책이 ‘휴’라고 쓰면 ‘안전한가’라는 뜻으로 바꿔 읽었다. 별일이 없다면 그냥 점 하나를 찍는다. 점 없이 ‘네’ 등으로 답이 간다면 검거됐다는 뜻이므로 조직원들은 즉각 몸을 숨긴다.
마포서가 검거한 다른 보이스피싱 조직원들도 마찬가지로 검거 여부를 총책에게 알리는 암호를 사용해 수사팀을 혼란에 빠뜨렸다.
조직원 검거 사실을 안 총책이 역으로 허위 정보를 메신저로 보내는 바람에 경찰은 검거한 조직원을 데리고 엉뚱한 곳을 돌다 한동안 허탕을 쳐야 했다.
심지어 한 조직 총책은 이렇게 경찰을 실컷 괴롭히고 나서는 검거된 조직원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수사관을 바꾸라고 한 뒤 욕설을 퍼부으며 “이놈들아. 우리가 모르는 줄 아느냐”라고 조롱까지 했다고 한다.
마포서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중국 현지와 연계된 3개 보이스피싱 조직을 적발, 사기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유씨 등 9명을 구속하고 이모(28)씨 등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9일 밝혔다.
이들 가운데 ‘쩐의 전쟁’ 조직원 유씨와 윤모(19)씨는 올해 5월부터 7월까지 중국 총책 지시를 받고 대포통장 247개를 이용, 보이스피싱 피해금 8억4000여만원을 국내 은행에서 인출해 총책에게 무통장 송금했다.
송금액의 4%는 자신들 몫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 기간 챙긴 돈은 3400여만원에 달했다. 그나마 두 달 중 한 달은 중국 현지 조직에 사정이 생겨 일을 쉬었으므로 실제로는 한 달간 1인당 1700여만원을 벌어들인 셈이다.
수백명 선으로 추정되는 피해자들은 대부업체를 가장해 저금리로 돈을 빌려준다는 말에 속아 수수료 명목으로 돈을 송금한 이들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유씨와 윤씨가 위챗으로 중국 총책에게 전송한 카드와 전표 사진을 토대로 송금액을 추산했으므로 삭제된 사진들이 더 있다고 전제하면 피해액은 훨씬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유씨는 입대 전 빚을 갚으려고 돈을 벌 방법을 찾다 올해 4월 인터넷에서 ‘단기간 고수익’을 제시한 광고를 보고 연락해 인출책이 됐다. 돈이 꽤 쏠쏠하게 벌리자 고등학교 친구인 윤씨까지 끌어들였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중국 현지 조직과 친분관계까지 쌓은 한국인 조직원도 있었다.
대구 출신 선후배들로 구성된 조직에서 통장모집 총책을 맡은 박모(28·구속)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대포통장을 모아 달라는 중국 조직 의뢰를 받고 한국에 있는 친구 2명과 후배 1명을 중간책과 통장 전달책으로 끌어들였다.
중국 칭다오에 머무르며 인터넷 광고를 이용한 대포통장 매입과 전달 등 통장모집 업무를 총괄하던 그는 국내 조직원인 고향 후배가 검거되자 대책을 논의하려고 최근 귀국했다가 경찰에 결국 덜미를 잡혔다.
함께 검거된 인천 출신 조직원 3명도 중국을 오간 출입국 기록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중국 조직과 별도의 유대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검거된 조직원들의 통화내역과 계좌 입출금 내역 등을 토대로 다른 공범을 수사하면서 중국 조직도 추적할 계획”이라며 “대부업체나 수사기관을 사칭해 수수료나 계좌이체를 요구하는 전화는 즉시 끊거나 신고하라”고 말했다.
[매경닷컴 디지털뉴스국]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