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독일 쾨르버재단에서 하기로 예정됐던 연설이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을 잇는 '신베를린선언'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독일 순방길에 오르기 전날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북한이 ICBM 시험발사로 도발한 것이다. 이로 인해 당초 계획한 연설문이 크게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전망 역시 빗나갔다.
문 대통령은 6일(현지시각) 독일 쾨르버 재단에서 "올바른 여건이 갖춰진다면 언제 어디서든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며 남북 정상회담을 공식 제안했다. 문 대통령은 또 ▲10·4 이산가족 상봉 개최 ▲군사분계선 적대행위 상호 중단 ▲남북 교류·협력 대화 재개 ▲평창 올림픽에 북한 참가 요청'과 같은 구체적인 제안도 꺼내들었다. '무모' '실망' '유감' '응징' 등의 용어를 구사하며 북한의 도발을 강한 어조로 규탄했지만 남북간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만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자신의 철학을 분명하게 밝혔다. 실제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선언' 정신을 잇겠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베를린구상'이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선언'과 같은 효과를 남북 관계에 가져올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이 더 많다. 당시와 상황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베를린선언은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3년차인 2000년 3월 9일에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베를린선언을 '정경분리'가 아닌 '정경연계선언'이라고 여겼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이제까지는 정경분리 원칙 아래 민간 위주의 경협을 펼쳤다면 앞으로는 정부가 나서서 대북 관계를 적극적으로 열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밝혔다.
당시 대내외적인 여건도 좋았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닥친 가뭄으로 인해 최대의 식량난을 겪고 있던 소위 '고난의 행군' 시절이라 대외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통령이 베를린선언에 담은 ▲북한 경제회복 지원 ▲통일 아닌 평화정착 추구 ▲이산가족 상봉 제안 ▲이를 위한 남북 특사 교환이란 제안은 솔깃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상대적으로 유연한 리더십을 보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베를린선언 한달 뒤인 2000년 4월 10일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되었고 그 두달 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구상은 취임 두 달도 안돼 이뤄졌다. 더구나 이전 박근혜 정부에서는 남북간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상태였다. 문 대통령이 ‘남북 교류와 정치 분리' 의지를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대화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북한이 핵과 ICBM개발로 인해 지역 안보에 실제적인 위협요소가 되고 있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아버지와 달리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것도 2000년 당시와 중요한 차이다.
따라서 문 대통령의 베를린구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베를린선언 만큼 빠르게 남북관계의 개선을 가져올 가능성은 낮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와 대외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며 "변화된 환경에 맞는 새로운 정책이 나와야 하지만 과거 선언과 정책을 답습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의 베를린구상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선언과도 다르다. 박 전 대통령은 2014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 해결 ▲남북 민생 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 동질성 회복과 함께 '남북교류협력사무소'를 제안했다. 이에 북한은 "흡수 통일을 하려는 대결 선언"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도발에도 압박과 함께 대화 카드를 포기하지 않고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박근혜의 드레스덴선언과 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며 "북한의 반응과 상관없이 한국 정부의 대북 기조가 일관되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문 대통령의 신 베를린 구상은 매우 구체적이다. 이산가족 상봉이란 미시적 요소부터 남북 정상회담 개최라는 담대한 목표까지 많은 것을 담았다"며 "북한이 우려하는 '흡수통일'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남북 관계에 대한 문 대통령의 철학과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고 했다.
외교부 1·2차관을 지낸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한반도에 평화를 주도적으로 해결해나가겠다는 문 대통령의 철학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시운이 따라주지 않고 북한이란 상대방이 우리 정부의 노력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이 가장 큰 현실적 제약"이라고 말했다.
[김기철 기자 / 박태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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