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은 사회 각 부문에 걸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한 민주화 시대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급격한 개혁 추진 과정에서 일부 부정적 측면이 부각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촉발을 비롯해 집권 말기에 터진 친인척 비리, 성수대교 붕괴 등 각종 대형 인명사고도 그의 오점으로 기억된다.
1997년 11월 22일 IMF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경제 위기를 불러일으킨 사건은 그의 최대 실책으로 기록됐다. 물론 고도 성장기에 한국 사회에 축적되어온 모순이 일순간 폭발한 것으로 이를 김영삼 정부의 책임으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도 상당하다. 1992년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던 ‘쌀시장 개방불가’ 방침을 어긴채 우루과이라운드(UR) 쌀시장 개방을 추진하면서 결국 대통령의 사과까지 이어진 점도 실책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탈냉전’시대가 도래하면서 촉발된 ‘자유무역의 대세’를 대외의존형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집권 말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던 데는 각종 대형 인명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1994년 10월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대구지하철 화재, 사망자 501명을 기록한 삼풍백화점 붕괴 등 대형 사고가 잇따르면서 민심이 흉흉해졌다. 또한 재산상속에 눈이 멀어 자신의 부모를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박한상 부모 살해사건’,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며 묻지마 살인행각을 벌인 ‘지존파 사건’ 등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의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는 측면도 있었다.
차남 김현철씨를 포함한 측근 비리도 오점으로 남아있다. ‘소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던 김현철씨는 1997년 1월 한보그룹 특혜대출 비리사건이 터지자 ‘한보비리의 몸통’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현철씨는 결국 그해 5월 17일 기업인으로부터 청탁과 함께 66억여원을 받고 12억여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구속됐으며 이후 2년간 실형을 살았다. 김 전 대통령은 그러나 현철씨의 검찰 소환부터 구속 수감, 형 집행까지 모두 지켜보는 아픔을 겪어야 했지만 ‘성역없는 수사’를 지시한 점은 평가받을 만 하다. 현직 대통령 아들로서는 처음으로 구속 수감되며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수사 및 법 집행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이 외압을 행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와 함께 ‘YS의 집사’로 알려진 장학로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은 야당의 폭로로 17개 기업으로부터 수십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장 전 실장은 군부정권 시절 김 전 대통령이 연금에서 풀려났을 때 홀로 상도동에 머물며 수발을 들 정도로 측근 중 최측근이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의 선처를 위한 구명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안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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