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공개된 '월성 1호기 원전 폐쇄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 보고서'에서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이른바 한국 직장에서 샐러리맨 출세의 법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대목이었다.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추진한 배경에는 대통령의 '질문'이 있었다. 청와대 보좌관이 월성 1호기를 방문하고는 외벽에 철근이 노출돼 있는 등의 문제를 제기하자 대통령이 월성 1호기의 영구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지 물었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백 장관은 산업부 공무원들에게 월성 1호기 조기 폐쇄와 즉시 가동 중단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꽤 한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일 것만 같다. 종종 한국 직장에서는 상사의 의중을 파악해 그의 의중대로 일처리를 하는 게 출세의 지름길이 되곤 한다. 감사원 감사 결과를 보니, 백 전 장관 역시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해 그 의중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그러나 상사의 의중이라는 게 항상 일관되거나, 숙의 끝에 나온 게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다. 대통령이나 최고경영자(CEO)는 중요한 여러 현안을 다룬다. 그러다 보니, 개별 현안에 대한 정보가 깊지 않을 때가 많다. 먼저 접하게 된 정보에 따라 인식이 편향될 수 있다. 나중에 반대된 정보가 들어오면, 그 인식이 수정되는 것도 가능하다. 대통령의 경우, 애초에 탈원전이 공약이었고, 철근 노출 등의 문제를 보고받은 이상 '월성 1호기에 대한 부정적 편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애초부터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쪽으로 경제성 평가의 방향을 잡기를 원했을 리는 없을 거 같다. 월성 1호기 폐쇄 같은 큰 현안은 의사결정에 필요한 여러 다양한 정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판단해야 한다는 건 당연하다. 대통령도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월성 1호기에 대해 경제성 평가를 정확히 하고, 그 정보를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것 또한 공직자의 사명이다.
그러나 한국 직장에서는 그런 게 쉽지 않다. CEO의 의중에 반대된다 싶은 정보를 그의 책상 앞에 올려놓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의중과 다른 얘기를 듣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와 상충되는 정보를 내놓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인지적 구두쇠'라는 인간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머리 쓰는 걸 싫어한다. 깊이 있는 사고를 기피한다는 뜻이다. 뇌를 쓰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반대되는 여러 정보를 수집하기보다는 한쪽 방향의 정보만 수집하려 한다. 이를 근거로 의사결정을 하고 싶어 한다. 이는 인간의 기본적 본성이다. CEO도 인간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만약 CEO에게 기존의 의중과 상충되는 의견과 정보를 제시하면 어떻게 될까? 이는 CEO에게 숙의와 사고에 에너지를 쓰라는 뜻이 된다. 그의 인간적 본성과 상충되는 행동을 하라는 뜻이 된다. CEO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다. 그런 상황에 처한 상사들이 짜증과 화부터 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마도 백운규 전 장관은 이 같은 인간 본성의 한계를 잘 안 것 같다. 백 전 장관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몇 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상사라는 사람들은 대개 그 본성의 노예라는 걸, 그러므로 부하 직원들은 그 본성을 잘 살펴야 한다는 걸, 그 본성에 아부하는 사람들이 출세할 확률이 높다는 걸 경험과 직관으로 안다. 반대로 그 본성에 도전하는 이들은 출세길에서 멀어진다는 걸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의 직장인들은 상사의 의중을 살펴, 그의 의중을 실현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그게 지금까지 한국의 직장 문화였다. 감사원 감사 결과가 맞는다면,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를 밀어붙인 백 전 장관도 한국의 직장 문화를 극복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 같은 직장 문화로는 더 이상 국가와 기업 조직이 발전할 수가 없다. 우선 CEO와 상사는 '정보의 진공상태'에 빠진다는 게 문제다. 자신의 기존 편향에 부합되는 정보만 제공받는다. '당신 생각이 옳습니다'라는 얘기는 듣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보를 못 받는 '진공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다. 만약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이 예상보다 높게 조사됐다면, 그 정보를 거침없이 대통령에게 가져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에이미 애드먼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조직 구성원들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혁신이 나온다"라고 했다. CEO나 상사에게 어떤 말이든 안전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여러 다양한 혁신적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다. 조직원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조직은 CEO의 생각과 비슷한 아이디어만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조직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승자가 될 수 없다. 만약 산업부 공무원들이 대통령 앞에서 월성 1호기의 경제성을 안전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면, 이번 감사원 감사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왔을 것이다.
[김인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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