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간질이라 불렸던 뇌전증은 뚜렷한 유발 원인이 없어도 반복적인 발작 증세를 보이는 일종의 경련성 뇌질환으로, 인구 1,000명당 약 7명이 앓고 있다고 알려진 비교적 흔한 만성 신경계 질환이다. 이러한 뇌전증 종류는 수십 가지로 매우 다양하며 발병 연령, 발작 종류, 뇌파·뇌 영상 소견 및 경과 등이 환자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치료법을 고려하게 된다.
이중 소아청소년기에 가장 흔히 발병하는 '양성 롤랜딕 뇌전증(BRE, benign Rolandic epilepsy)'은 중심 측두부 극파를 보이는 소아기 양성 뇌전증으로써 특징적인 뇌파가 관찰되며 주로 수면 중에 발생한다. 대부분 소아 시기에 발병해 청소년이 되면서 자연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경련 증상을 차단하기 위해 별도로 항경련제를 투여하지 않고 경과를 지켜보는 경우도 있다. 다만 발작이 자주 발생하거나 길게 지속될 경우, 발작이 수면 중이 아닌 낮 동안 일어나는 경우에는 항경련제를 투여하는 등의 적극적인 치료가 요구되기도 한다.
그러나 뇌성장이 활발히 이뤄지는 소아청소년기에 약물을 언제까지 복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많은 고민이 있었다. 뇌파 이상으로 인한 발작이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도 뇌파가 정상화되는 구체적인 시기를 판단하기 어렵고 발작 재발을 우려해 기존의 약물치료를 중단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연구진이 양성 롤랜딕 뇌전증 환자의 뇌파 정상화 시기를 상세히 밝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신경분과의 황희, 김헌민, 최선아 교수 연구팀은 미국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 뇌전증센터의 데니스 들루고스 박사팀과 공동 연구를 진행해 134명의 양성 롤랜딕 뇌전증 환자를 대상으로 뇌전증 발병부터 완화까지 일련의 과정을 최장 10년간 추적 관찰한 결과, 양성 롤랜딕 뇌전증 환자의 비정상적인 뇌파가 사라지는 연령은 평균 11.9세이며, 전체 대상자 모두 만 17세 이전에는 뇌파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3일 밝혔다. 발병 후 뇌파가 정상화되기까지는 평균 3.76년이 걸리는데 짧게는 1년부터 가장 길게는 10년까지 다양하게 관찰됐다.
연구팀은 항경련제 약물치료를 받지 않은 그룹에서 비정상 뇌파가 지속되는 시간이 약물치료를 받은 그룹에 비해 짧은 것을 확인했다. 이는 약물치료를 하는 것이 반드시 뇌파를 정상화시키는 것은 아님을 뒷받침하는 결과다. 덧붙여 뇌파에 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1~2년 이상의 충분한 기간 동안 발작 증세가 없으면, 환자에게 투여하는 약물을 감량하고 점진적으로 중단하는 것이 안전함을 다시 확인했다. 약물 투여를 중단할 당시 양성 롤랜딕 환자의 뇌파에 이상이 있었던 경우일지라도, 치료 중단 후 발작이 재발하지 않고 증세가 완화되는 경향을 보인 것이다.
김헌민 교수는 "양성 롤랜딕 뇌전증은 소아가 일정 연령이 될 때 사라지는 예후가 매우 좋은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오래하는 경우가 많아, 연구를 통해 환자 및 보호자 분들에게 뇌전증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치료에 필요한 정보를 드리는 등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며 "우리나라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이번 연구는 뇌파의 정상화 시기 및 연령 등 뇌전증 치료 결정에 도움이 되는 요인을 밝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뇌전증 치료를 위한 약물 사용기간을 최소화하여 성장기에 있는 소아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소아신경분야 국제 학술지인 'Brain&Development' 최신호에 게재됐다.
[이병문 의료전문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세요.